왜 의사가 됐느냐고 물었더니 "성적이 안 돼서"라고 답이 돌아왔다. 조금 어이없었지만 성적이 됐더라면 무엇이 되고 싶었냐고 다시 물었다. 잠시 주저하더니 물리학자라고 답했다. 혈관외과 분야에서 대구가톨릭대병원을 전국적인 명성을 떨치게 주인공 박기혁(47) 교수. 그가 의사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너무 단순해서 재미없을 정도다. 하지만 그는 늘 고민하는 의학도였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더 잘 할 수 있는지 꾸준히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사람이었다. '똑똑한 사람은 의사가 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그의 속내를 들어보자.
◆의사가 되기 싫었던 의사
"중상위권 정도의 성적으로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의사가 돼야 합니다. 정말 똑똑한 사람은 기초과학을 해야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10만 명을 먹여살릴 수 있는 천재들이 의사가 되고나면 고작 자기 가족이나 병원 직원 먹여살리는데 그칩니다. 의사는 첨단 기기를 사용하는 유저(User)일 뿐입니다. 의료라는 거대한 산업에서 정작 신약과 첨단 기기를 개발하는 사람은 의사가 아닙니다."
천재가 아니어서 물리학자가 되지 못했다는 그는 의대 생활도 무척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본과에 들어가서는 무조건 암기하는데 급급했다. 공부에 대한 취미도 잃고 도전정신도 사라졌다. 그저 재시험과 유급을 피하기 위해 외우고 또 외울 따름이었다.
"의대를 졸업하고 바로 공중보건의로 갔습니다. 그저 조용하게 살고 싶어서 당시 오지 중의 오지였던 봉화군 재산면 보건지소로 갔습니다. 시간이 멈춘 듯 조용한 곳이었죠." 아무 생각없이 그저 '멍하니' 보냈던 3년 생활을 마치고 그는 인턴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엔 정신과를 지원했습니다. 인간의 의식을 파고드는 심오한 분야라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그는 결국 정신과를 포기했다.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 한밤중에 당직을 서다가 배가 고팠던 그는 매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섬뜩한 기분이 들어 컴컴한 복도 끝을 봤더니 한 아주머니가 쓰레기통을 뒤지며 먹다남긴 라면 찌꺼기를 먹고 있더라는 것. 나중에 알고 보니 중환자실 보호자인데 그만 정신줄을 놓아버린 사람이었다. "정신과 환자인 셈인데, 애정이 느껴지기는커녕 두렵고 꺼려지기만 했습니다. 환자를 제 몸처럼 아끼고 사랑해도 제대로 치료할지 자신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신과는 제가 가야 할 분야가 아니더군요."
◆노래만큼 좋아한 혈관외과
외과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 피를 보는 것도 싫었고, 긴 수술시간도 힘들었다. 어느 날 산부인과에 응급환자가 들어왔다. 분초를 다투는 급박한 상황. 선배들이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외과의 매력을 처음 느꼈고, 열심히 해야할 목표도 생겼다. 인턴 동기가 먼저 외과 레지던트에 지원한 탓에 그는 울산의 한 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기다리며 1년간 근무해야 했다. 마침 그 병원에서 맡은 분야도 외과였다. 외과지만 외과 역할을 전혀 못하는 현실을 거기서 봤다. 결심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공부를 하자고 결심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레지던트 3년차 때엔 미국 외과학회를 처음 가봤다. 전세계에서 수천명의 외과의사가 모인 자리. "외과의사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이 많다고 새삼 느꼈습니다."
레지던트를 마치고 대구가톨릭대병원에서 '혈관외과' 교수를 찾는다는 말을 들었지만 당시만 해도 '혈관외과는 뭐하는 곳이야?'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서울 삼성병원을 찾아가 혈관외과를 다시 공부했다. "음악 과목을 싫어했지만 노래는 밥보다 좋아했다"는 그는 어느 순간 "노래만큼 혈관외과가 좋아졌다"고 했다. 혈관이 막혀 썩어가던 다리가 다시 핏기가 돌면서 살아났고, 혈관이 터져서 사경을 헤매는 환자를 극적으로 살려내기도 했으며, 혈관이 막힌 환자에게 새로운 혈관을 줘서 꺼져가는 생명을 되살리기도 했다.
"포항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7세 아이가 응급실에 실려왔습니다. 골반혈관이 터져서 혈압을 겨우 유지하며 대구까지 온 것이죠. 방법은 수술 뿐이었습니다. 고맙게도 상태는 크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몇 시간 수술에 매달린 끝에 살려냈습니다. 혈관수술 환자 중 가장 어린 환자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7년쯤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꼭 살리고 싶었던 환자였고, 수술에 성공해서 무척 기뻤습니다."
◆국내 최초로 수술법 소개
박 교수가 12년 전 처음 대구가톨릭대병원에 왔을 때만 해도 다른 대학병원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처음 2년간 동맥 수술 환자는 통틀어 20명이 채 안됐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 뒤 그는 한 해 150명 가까운 동맥 환자를 수술했다. 정맥까지 합치면 300~400명에 이른다. 서울 유명 병원에도 뒤지지 않는 실적이다. 병원 단위가 아닌 의사 개인 실적으로는 거의 최고치에 가깝다.
"미국에서 연수할 때였습니다. 당시 대동맥 수술의 세계적 대가가 함께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아직 검증이 안 된 '스텐트 삽입술'(동맥이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인공 보조기구를 혈관에 집어넣는 것)을 배우더군요. 기존 수술법만으로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대가가 새로움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이를 국내 학계에 보고했다.
하지만 선배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검증도 안 된 수술법을 어떻게 쓰느냐며 오히려 면박을 줬다. 비록 시작하는 단계였지만 오히려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많음을 직감했다. 수술 부위를 메스로 자르는 대신 가느다란 관을 삽입하는 '혈관내 수술법'을 우리나라에서 처음 혈관외과 분야에 도입했다. 또 기존에 동맥을 찔러 조영제를 투입한 뒤 혈관 사진을 찍는 대신 CT(컴퓨터단층촬영)로 동맥을 촬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도 보여줬다. 2003년 'CT 동맥촬영장치'를 처음 소개했을 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비난을 들었지만 지금은 많은 병원에서 동맥을 촬영할 때 CT를 사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50여 편에 이르는 관련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다양한 임상경험을 통해 쌓은 연구 결과를 2009년 미국 혈관외과학회, 2009년 아시아혈관외과학회에 발표해 '최우수 과학자'상을 받았다.
그는 연구하는 의사이자 고민하는 의사다. "연간 의료기기 수입 중 가장 많은 돈을 쓰는 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스텐트입니다. 그 간단한 기구를 수입하는데 연간 6천억원이 쓰입니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면, 정말 똑똑한 사람이 의사가 아니라 기초과학을 했더라면 우리나라가 오히려 의료기기를 수출하지 않았을까요?" 그는 의사의 우선 덕목으로 성실함과 창의성을 꼽았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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