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 소리없이 흐른다. 활처럼 휘어진 강변을 따라 모래밭이 이어진다. 강과 모래밭을 낀 산비탈이다. 늙은 부부가 밭을 갈고 있다. 할머니는 쟁기를 끌고, 할아버지는 밀고 있다. 걸음은 느리다. 흙은 부서지고, 자갈과 돌은 나뒹굴고 있다. 밭이랑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척박한 땅은 조금씩 변해간다.
산비탈 양지바른 기슭에는 소와 송아지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사람은 일을 하고, 소는 쉬고 있다. 희한하다. 시간은 흐른다. 노인들의 주름살도 조금씩 늘고 있다. 그렇게 세월도 흐른다.
◆소와 함께 한 삶
봉화군 소천면 현동3리 배나들마을, 정춘교(74)·이점남(63)씨 부부.
33년을 소와 더불어 살고 있다. 2남 4녀를 키웠다. 부부에게 소는 '또 다른 자녀'이자, '동반자'다.
정씨는 6남매를 키웠지만, 소가 없었으면 그렇게 키우기 어려웠다고 했다. 6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보낸 것도 소 덕분이라고 했다. 정씨가 이십팔 년 간 함께한 소 한마리는 지금 집 앞 큰 밤나무 아래에 묻혀 있다. 그동안 새끼 23마리를 낳으며 동고동락한 뒤 5년 전 죽었다. 그 소가 묻힌 밤나무 아래에는 시퍼렇게 잘 자란 풀들이 빼곡하다. 정씨는 가끔 감나무 아래를 지켜보며 눈시울을 붉힌다.
정씨는 소 이야기를 한다. "요새 수의사들이 종자를 갖다놓아도 뭘 알겠나. 요즘 소는 덩치만 크지 오래 못살아. 옛날에 산에서 풀 먹고 자란 재래종은 오래 살아. 내 밭 갈던 소는 이십팔 년을 살았는데, 새끼를 스물세 마리 낳았지. 소는 십삼 개월이면 새끼 가지는데, 두 살 되면서부터 매년 한 마리씩 낳지. 스물 셋 놓고는 이후 5년 동안 빌빌해가지고 새끼를 잘 못놓아. 그 소 덕에 육남매 대학 다 시켰지 뭐."
정씨는 "내 소는 일을 참 잘했지. 재 너머 분천4리도 갔고, 현동 시내(소천면 소재지)까지도 갔어.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산비탈에 기반(경작) 정리가 잘 안돼 농기계로는 밭을 갈 수가 없었지. 옛날에는 사람 하루 일당보다 내 소가 받는 일당이 훨씬 높았어"라고 말했다.
"소도 늙어 죽으면 땅으로 가야지. 지구상 모든 것은 흙으로 가고, 또 나무나 풀, 음식도 모두 흙에서 나오는 거지. 썩어서 거름이 되고, 다시 태어나고…. 허허."
정씨는 지금 새로 지은 집에서 살지 않는다. 5년 전 죽은 소의 우사가 있는 집에서 기거하고 있다. 정씨는 소가 쟁기를 끌다 지치면 쉬게 하고, 대신 부인과 함께 쟁기를 끈다. 사람과 소가 소통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운 남편
이분이(87) 씨는 지금도 10여년 전 하늘로 간 남편을 그린다.
이 씨는 열세 살 꽃다운 나이에 태백 장성으로 시집갔다. 6·25 전쟁 통에 배나들마을을 거쳐 봉화 석포로 피난을 갔다. 남편 고(故) 김덕만 씨는 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가 중석 광맥을 발견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중석을 캐 판 돈으로 정착한 곳이 바로 피난시절 들렀던 이 곳 배나들마을이다. 이 씨 부부는 배나들 땅 상당 부분을 매입,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그는 "내가 먼저 갔을 뻔 했는데, 그 양반이 먼저 가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씨는 남편의 흠결을 말하며 "술을 먹고 주정을 해 그렇지 딴 건 아무 것도 허물이 없어. 현동(소천면)에서 술을 먹으마 술집이란 술집은 한 집도 빼먹지 않고 다 거쳐서 돌아왔지"라며 탄식과 그리움을 내뱉었다. 50대 후반, 이씨는 낙동강 물에 빠져 자살하려고 했다. 그는 '남편의 주사(酒邪)'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이씨를 구했던 장현탁(57) 씨가 말했다. "친구랑 마을을 내려가고 있는데 (이 씨의) 애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더라고. 강 쪽으로 보니 아지매(이 씨)가 뛰어서 돌다리(고제나루) 근처 강물로 들어가더라고. 그 때 강물이 많았는데, 딱 1초만 늦었어도 (이 씨의) 손이 안보여 놓쳤을 거야. 내가 정말 100m 선수보다 더 빨리 뛰었다니까. 아지매를 강에서 건져 들쳐 업고 막 뛰어나오는데 탄가루에 미끄러져 넘어져 버렸어. 그 때 아지매 입에서 '콱' 하고 물이 탁 튀어 오르는데, 탄가루도 섞여 나오더라고."
이 씨의 '자살미수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추희(75·여) 씨는 이 씨 부부에 대해 '잉꼬 부부'라고 했다. 나은경(44) 씨는 "두 분을 보면서 '부부란 참 저렇게 살아야 하는구나'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 씨는 "그래도 남편과 함께 피난 와서 살 때가 제일 좋았지"라고 회상하며 얼굴을 폈다.
이 씨가 강물에 빠진 시점을 전후해 70년대 광산개발 붐이 일면서 배나들마을 앞 낙동강은 그야말로 탁한 물이었다. 강물이 태백의 광산에서 내려온 탄가루가 섞여 크게 오염됐던 것. 이 씨는 "석탄가루가 강바닥에서 허리만큼 쌓일 때도 있었다"고 했다. 이점남(63) 씨는 "당시 우리 애들이 강을 그릴 때 파란색이 아니고 검은색으로 그릴 정도"라고 했다.
◆강과 마을에 대한 애틋함
장현탁(57) 씨는 고향을 잠시 떠났다 되돌아온 뒤 배나들의 내일을 가꾸는 이다.
그는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나 생후 6개월 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배나들 뒷산 '중미'에 안착했다. 열 살 때부터 강 건너 '고제'에서 살았다. 군 제대 후 태백 장성광업소에서 6년 간 일하다 아내를 만났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일이자 취미는 강과 마을을 살리는 것. 배나들 앞 낙동강에 얼음치, 쏘가리 등 치어들을 방류, 건강한 생명을 되찾는데 애쓰고 있다. 마을 중앙에 있는 소수력발전소를 관리하며 주변을 꽃과 나무로 가꾸고 있다. 특히 물가에서 주로 자라는 장미과 '열녀목' 모종을 주위에 분양해 '배나들 나무'로 확산시키고 있다. 꽃의 향과 나무의 싱그러움이 가득한 마을로 가꿔나가고 있는 것이다.
황토체험마을도 운영하고 있는 장 씨는 "10~20년 전보다 강물이 훨씬 줄었다. 강이 없으면 비옥한 토지도 있을 수 없다"며 강의 소중함과 혜택을 강조했다.
배나들 강 건너 '고제'를 홀로 지키고 있는 김중희(81) 씨. 평안북도가 고향인 그는 6·25 때 홀로 강원도 태백으로 왔다. 태백 장성에서 자식을 다 키운 뒤 30년 전부터 고제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난 여기서 묻힐 거래요. 죽는 날까지 여기서 살 거래요."
옛날 대 여섯 가구가 있던 고제에서 지금은 홀로 낙동강 물을 젖줄로 콩, 감자, 고추농사를 짓고 있다. 김 씨는 "개량종 고추를 심으니까 분종이 돼 버린다. 수확은 개량종만큼 안 되지만 토종고추는 맵고 맛이 좋아 그래도 토종을 심는다"고 했다. "강이 좋고, 공기가 좋아 가족들과 떨어져 있어도 후회는 없다"고 했다.
◆배나들 사람들
70년대 말 화전민의 삶을 접고 배나들에서 소와 더불어 살아온 정춘교·이점남 씨 부부, 열세 살 꽃다운 나이에 시집가 꿋꿋이 7남매를 키운 뒤 먼저 간 남편을 그리는 이분이씨, 고향에 대한 애틋함을 몸으로 실천하는 장현탁·백명숙(57) 씨 부부, 고제에 뼈를 묻겠다는 농사꾼 김중희 씨. 배나들은 그들이 지키고 있다.
드럼통 배로 아이들 학교를 보냈던 김두호(58)·김춘화(54) 씨 부부, 척박한 고제에서 6남매를 키워낸 이제련(84) 씨도 배나들 지킴이다. 대대로 배나들을 지키고 있는 강기원(81)·박분남(86) 씨 부부, 사업 실패로 95년 대구에서 떠나온 뒤 재래종과 친환경농산물을 생산하며 이웃과 더불어 제2의 고향에 정착한 홍문표(57)·나은경(44) 씨 부부 등등.
강과 산과 사람이 오롯이 얽히고 설킨 배나들마을은 그렇게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작가 권상구·조진희 ▷사진 박민우 ▷지도 일러스트 이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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