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주파수 오작동

함께 밥을 먹은 적도 차를 마신 적도 없는 사람이 뜬금없이 나를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휘적휘적 걸어와 생각 속에 머문다. 머물다 간다. 반면에 끊임없이 텔레파시를 보내는데도 반응이 없는 사람도 있다. 이럴 때 나는 주파수가 오작동을 일으킨 것이라고 믿는다.

교육 문제로 딸아이를 잠깐 떼어 놓은 적이 있다. 떼어 놓고 보니 아이가 나의 일부분이라는 게 맞는 말이었다. 반쪽만 남게 되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져 버린 듯 허전했다. 무엇을 해도 무슨 일을 하고 있어도 생각의 촉수는 아이가 있는 곳을 향해 더듬이를 움직였다. 나는 날마다 아이를 느끼고 싶어했고 안전을 확인하고 싶어했으며 아이가 잠자리에 든 걸 확인한 후에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멸치를 볶다가도 키보드를 두들기다가도 아이에게 주파수를 맞추었다. 지지직, 잡음이 심하거나 송신에 문제가 생기면 하던 일을 멈추었다. 마음은 이미 몸을 벗어던지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아이가 좋아하는 요리를 할 때는 목구멍부터 뜨거워졌다. 불러다 먹이고 싶어 안달이 났다. 오물거리는 입 모양이 보고 싶어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때마다 나는 주인이 떠난 빈 방의 침대에 걸터앉아 아이와 교감하기 위해 마음을 모았다.

언니나 선배가 자식은 평생의 족쇄라는 말을 했었다. 족쇄를 차고 다니는 선배와 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다 컸는데, 자기들이 알아서 할 텐데 무엇 때문에 궁금해하고, 참견을 하고 닳아가며 헌신하는 걸까. 나중에 자신을 위해 닳아준 걸 알기나 할까.

누가 나 때문에 닳으라고 했어요? 자식의 말에 휘청거리지 않으려면 조금씩 버리는 연습을 하라고 자신만의 삶을 찾으라고, 그게 현명하다고 충고했었다. 그 말을 했을 때 언니도 선배도 웃었다. 웃기만 했었다.

막상 아이를 떼놓고 보니 언니나 선배가 왜 웃었는지 이해가 간다. 몸만 곁에 없다 뿐이지 곁에 있을 때보다 더 애가 쓰인다. 나에게 있어 아이는 세 살이든, 열 살이든, 열일곱 살이든 그냥 애일 뿐이었다. 반면 아이는 내가 서운함을 느낄 만큼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해 나가고 있다. 전화 연결이 되면 '왜?'라고 물어 내 기분을 처참하게 만들 때도 있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조금씩 나를 밀어내는데 엄마인 내가 도리어 부적응 행동을 보인다. 내가 보내는 집착적 텔레파시가 혹 아이의 성장을 저해하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테러는 아닐까.

임수진(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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