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는 세상을 이해하고 관조하는 두 개의 수레바퀴가 아닐까. 20대에 지녔던 그 가슴으로 평생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았던 사람이 미 노예해방론자 캐시어스 마르셀루스 클레이(1810~1903)이다. 남부 켄터키주에서 가장 부유한 농장주를 아버지로 둔 클레이는 예일대 재학시절 노예제 철폐론자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의 연설에 감동, 마치 목마른 여행자가 물을 얻듯 반노예제 운동에 헌신했다.
3번에 걸쳐 켄터키주 공화당 하원의원을 지낸 그는 4선 공약에 노예제 폐지를 내걸었다가 패배하고 'True American'이란 반노예제 신문을 창간했다. 이때 한 달간 3번의 살해위협을 겪으면서도 권총으로 무장한 채 계속 신문을 발행했다.
남북전쟁 때는 링컨이 스페인 대사로 임명했으나 거절하고 러시아 황제가 노예해방 칙령을 발표했었다는 이유로 러시아로 건너가 장관직을 맡기도 했다. 이 인연으로 후에 미국이 알래스카 땅을 구매할 때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 전쟁 후엔 링컨이 노예제 해방을 발표하기 전 각 주를 돌며 조정자 역할을 했다. 말년엔 그랜트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비난하며 공화당을 탈당하고 민주당 선거를 돕기도 했다. 이 때문에 클레이는 혁명가와 투사라는 두 개의 평판을 지녔다. 1903년 오늘 92세로 사망했다.
우문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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