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나오지 않는다. 아주 안 나오는 것도 아니고 새듯이 흐르고 있는 물줄기가 짜증스럽다. 찜통 더위에 물이 끊기다니. 내가 사는 산촌 마을엔 상수도 시설이 안 돼 있다. 그래서 집집마다 땅을 파고 지하수를 뽑아서 생활용수로 사용한다. 지하수의 고갈로 지난봄 앞집도 물길이 끊겼다. 그래서 새 물길을 찾는다며 시추공을 매단 육중한 덤프트럭이 내 작업실 앞마당까지 밀고 들어와 소란스러운 봄을 보냈다. 앞집 마당이 비좁기도 했거니와 꽃나무들도 옮겨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돈도 많이 든다고 한동안 앞집 예솔이 할머니의 근심이 컸다.
애당초 나도 작업실을 지을 때 암반층 아래까지 땅을 깊이 파야 했었는데 그때는 이런 난감한 일이 생길지 미처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있었다 해도 경비 절약을 해야 할 때였으니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조만간 공들여 가꾼 정원을 뒤엎고 지하수 물길을 다시 트는 공사를 시작해야 하니 심란한 요즘이다. 얼핏 잘 정돈되어 있는 듯한 우리 일상 속에는 이런 아슬아슬한 긴장들이 은밀하게 숨어있기도 하다. 그래서 휴가철을 맞아도 사람들은 선뜻 휴가를 떠나지 못한다. 이런 난제들이 나에게도 산재해 있건만 이번 여름은 왠지 시작부터 달랐다. 학기가 끝나자마자 여행 가방을 꾸려 뉴욕행 비행기를 타버렸기 때문이다.
비행기는 느리게 활주로를 감아 돌다가 돌연 굉음을 내며 공중으로 치솟아 오른다. 너무 익숙해서 뻔한 땅 위의 질서가 한순간 혼미해진다. 피카소의 그림처럼 내 얼굴이 여러 개의 표정들로 갈라져서 붕 뜬다. 그러나 비행기는 균형을 되찾고 나는 다시 글로벌 시대에 맞춘 학교의 인기 교육 프로그램인 '해외전공체험학습' 인솔 교수로서의 책임감을 자각하며 내 자리에 안착한다. 여행의 홀가분함 따위는 처음부터 기대할 입장이 못 되건만 그래도 홀연히 뉴욕 5번가를 거닐고 있을 내 모습에 이 무슨 횡재인가 싶기도 했다. 여자들의 온갖 욕망이 펄펄 살아 들끓는 영화 '섹스 엔 더 시티'의 그 도시 뉴욕이 아니던가? 하지만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일정을 점검하고 일행들을 재촉해 미술관으로 직행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서양화를 전공해 온 학생들이다. 늘 책이나 화보로만 보아왔던 그림들 앞에서 넋을 잃고 있는 그들에게 그 많은 거장들의 삶과 예술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족처럼 무언가를 자꾸만 설명하려 드는 선생의 마음을 나도 통제하기는 어려웠다.
세계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맨해튼 중심가의 현대미술관(일명 MoMA)이라니! 유리와 알루미늄, 화강암을 주재료로 자연 채광을 이용한 미술관 건물은 2004년 리모델링 되어 재개관했다. 5년 전 리모델링을 마친 모마를 내가 처음 관람했을 때는 미술관 중앙 로비에 설치되어 있던 바넷 뉴먼의 조각 '깨어진 오벨리스크'가 이번에는 정원으로 옮겨져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모마는 소장품 하나하나가 현대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걸작들로 넘쳐난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 마티스의 '춤'과 마르셀 뒤샹의 '자전거 바퀴', 앤디 워홀의 '금빛 마릴린 먼로' 등. 학생들은 황홀해진 눈을 비비며 그때마다 탄성을 지른다.
우리는 p.s.1 아트센터, 구겐하임 미술관, 허드슨 강가의 디아비컨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 독일표현주의 미술관 등 계획된 일정에 따라 지치는 법도 없이 미술관 투어를 진행했고, 그리고 집으로 무사히 귀환했다.
뉴욕의 미술관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붐비고, 이미 미술관 관람은 일상의 즐거움으로 자리를 잡아 문화적 에너지가 넘쳤다. 한 도시의 미술관은 심미적 처소 이상의 정신적 지주로서 시민들에게 꿈과 활력을 준다. 가족끼리 돈 없이도 다녀올 수 있는 훌륭한 여행지이기도 한 것이다.
대구에도 시립미술관이 완공되어 개관 준비를 하고 있다. 김용대 관장이 인터뷰를 통해 이미 밝힌바 있는 컬렉션 교류전뿐만 아니라, 대구 시민을 위한 문화 교육과 아웃리치 활동 또한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리 세계 최고의 미술관을 돌며 조형적 지식을 잔뜩 품고 돌아와도 내가 살고 있는 집과 마을, 우리 도시의 문제의식과 문화를 바깥에서 수입해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백미혜 대구가톨릭대 CU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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