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행복을 요리하는 의사] 숨겨진 걱정 그리고 우울

불치병에 걸린 사실을 알았을 때, 사람은 다섯 단계를 거쳐서 받아들이게 된다.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단계다. 환자는 때에 따라 여러 단계가 혼합돼 있기도 하고, 거꾸로 진행돼 임종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부정에 머무르는 경우도 있다. 호스피스병동에 근무하면서 누구나 '수용의 단계'로 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75세 최상철(가명) 할아버지는 췌장암 환자였다. 6개월 전 암을 진단받고, 모든 치료를 거부했다. 집에 머물다가 최근 통증이 심해져 응급실을 통해 평온관(호스피스병동)으로 입원했다. 할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은 뒤 손자를 포함한 가족 30여 명은 제주도로 마지막 여행을 다녀왔다. 할아버지는 이처럼 나름대로 의연하게 삶을 잘 정리하는 편이었다. 입원 2주일 후 암성통증이 조절되자 할아버지는 집으로 퇴원하길 원했다. 대개 통증과 증상이 조절되면 병원보다는 가정 호스피스가 훨씬 환자를 편하게 한다. 퇴원할 때 가정간호와 연계해 주고, 힘들면 응급실로 바로 오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퇴원 이튿날 아침 할아버지는 할머니 몰래 농약을 마셔서 의식을 잃고 응급실로 실려 왔다.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다행히 적절한 치료로 깨어났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입원한 동안 한 번도 힘들다는 표정이 없었는데 '누구도 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죽음의 공포가 늘 감정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나보다.

암 환자의 우울증 유병률은 1~53%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심한 통증을 겪는 환자들의 15%에서 주요 우울증을 갖고 있고, 조절되지 못한 통증이 불안을 증가시키는 유발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우울과 불안은 암 환자에게 통증 다음으로 흔한 증상. 약물치료와 심리적 치료를 통해 반드시 치료해 줘야 한다. 정신적 고통이 암 환자에게 피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돼서는 안 된다.

암 환자는 깊은 밤에 통증을 많이 호소한다. 통증은 감정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암 환자의 심리적 고통은 특징적인 정서 반응을 보인다. 처음에는 충격과 불신의 시기가 나타나고, 이어서 우울과 불안이 뒤섞인 증상을 보이면서 과민해진다. 집중력과 일상 활동의 수행 능력이 떨어지면서 진단에 대한 상념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을 뒤덮는다. 이것이 퀴블러 로스의 다섯 단계이다.

호스피스를 하면 철학가가 된다. 삶은 힘들고, 암과 같이 가는 삶은 더 많이 힘들다. 갑자기 암성통증이 밀려올 수도 있고, 과거에 대한 향수, 과거의 삶을 다시 되풀이할 수 없다는 슬픔을 느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자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자신의 내적 자아와 만나는 경험을 시작한다. 우리는 서로를 진심으로 도와줘야 한다.

김여환<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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