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원태의 시와 함께] 병들다/강해림

들린다는 건 하늘의 일

귀신도 아니고 넋도 아닌 것이 부지불식간에 들어와 버려

덜컥 병든 몸 빼도 박도 못하고

무덤까지 가지고 갈 병 하나 옆구리에 차고 사는 일

너 아니면 죽을 만큼 아파서

내 살과 뼈를 안치고 애끓는 일

그 많은 권태와

권태의 궁전에 핀 꽃들의 오지 않은 부음과

오지 않은 시간의 비문이 흘리는 농담과

죽은 꽃들의 다비식에 불려나온 늙은 고요와

제상에 올린 고봉밥보다 더 수북한

불온으로 배를 채우고도 허기져 손가락이라도 물어뜯다 죽을 일 징역 사는 일

진짜 무당이 되려면 만 번을 울고 가야 한다는데

만 번을 돌고 돌아 헤맬 일

대낮에 거울 속 캄캄한 무덤에서 나온 여자를 바라보는

참 쓸쓸한 일 칼 위를 걷는 일

두 발 달린 짐승이면서 한 번도 땅에 발 디뎌본 적 없는,

허공과 섹스 하는 일 내가 시 쓰는 일

'시 쓰는 일'에 대한 갖가지 정의가 분분했지만, 이 시는 거의 완결판이라 할 만하다. 시 쓰는 일은 한마디로 무병(巫病) 들듯 '들리는' 것이고, 그건 '하늘의 일'이란다. 그러하니 인간의 말로 내뱉는 이런저런 정의들은 모조리 수사(修辭)나 췌언(贅言)에 지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몇몇 적실한 뜻매김을 보여준다. '시 쓰는 일'은 "살과 뼈를 안치고 애끓는 일"이자, "징역 사는 일"이요, "참 쓸쓸한 일"이자, "칼 위를 걷는 일"이라 한다. 대저, '살아간다는 일' 자체가 '시 쓰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새삼 일깨워주기도 하면서.

시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