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산골 논배미

우리의 선조들은 농토를 한 뼘이라도 넓히려고 산비탈을 깎아 논밭을 만들었다. 가파른 경사에도 한 다랑이씩 계단식 땅을 일구었다. 내 고향도 예외는 아니었다. 눈뜨면 앞산은 이마에 닿고 뒷산은 등이 닿는 첩첩산중이었다. 논이라고 해야 굳이 한 마지기로 따지면 일곱 다랑이, 열 다랑이, 아니 어쩌면 스무 다랑이였고, 서 마지기면 한 골짜기를 차지할 정도로 평수 작은 논배미들이었다.

두 사람이 들어가서 모심기를 하면 엉덩이가 닿는 아주 작은 논배미. 모양에 따라 이름도 다양하게 갈치배미, 덕석배미, 삿갓배미, 바우배미 등 갖가지 이름이 붙었다. 논배미에도 등급이 있었다. 물길 좋은 수답과 거북등의 봉답으로 나누어진다. 비가 자주 안 오면 타들어가는 나락을 보며 울 아버지 속도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이처럼 땅에 대한 애착은 울 아바지, 우리 선조들에겐 신앙처럼 깊었다.

미국의 소설가 펄벅의 소설 '대지'에서 주인공 왕룽은 "이 땅이 없었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모두 굶주렸을 거고, 너도 학자랍시고 멋진 옷을 입고 느긋하게 돌아다닐 수 없었을 거야. 이 훌륭한 땅이 너를 농부의 자식보다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어." 라고 할 정도로 마지막까지 흙에 대한 애착은 대단했다.

아직도 논배미가 잘 보존된 곳이 있다. 관광지로 개발된 경남 남해 가천 다랑이 마을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가파른 층층의 다랑이 논을 보면서 흙의 소중함을 새삼 느낀다. 처녀가 시집갈 때까지 한 말의 쌀도 못 먹고 간다는 섬에서 신기할 정도로 물길을 내고 벼를 심어 쌀밥을 먹을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우리 고향의 현실은 산골 논배미들을 추억의 뒤켠으로 내몰고 있다. 굴삭기로 파헤져지고, 정지작업을 해버려 이제 논배미를 볼 수가 없다. 또 다른 논배미는 경작을 해봐야 씨앗 값도 안나오니까 묵정밭으로 변해 버렸다. 묵정밭은 개망초만 만발하고 멧돼지들의 놀이터로 바뀌곤 한다.

왕룽은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우리는 땅에서 왔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무도 땅을 옮기어 가지는 못한다" 며 아들에게 땅의 가치를 일렀다. 땅은 모든 생명의 시작이고 끝이다. 사라져 가는 산골 논배미를 보면 무논에서 느꼈던 어머니 품 속 같은 아늑한 원초적 포근함을 잊을 수가 없다.오늘따라 왜 이리 산골 논배미가 그리운걸까. 졸시를 옮겨본다.

어머이야 우리 논빼미 한 다랑이 없다이/논두렁이에 걸터앉아/ 논배미 헤던 막내둥이 눈물 찌렁 야단이네./ "얘야, 고 논빼미 점심참에 삿갓 밑에 숨었니라." 시-'산골 논빼미'중에서.

김창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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