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메디컬 프런티어] 경북대 호흡기내과 박재용 교수

'폐암 맞춤진단·치료' 선도…SCI급 논문만 102편

▲경북대병원 호흡기내과 박재용 교수는 폐암 환자의 개별 유전자 특성에 맞는 맞춤형 치료법을 개발하고 있다.
▲경북대병원 호흡기내과 박재용 교수는 폐암 환자의 개별 유전자 특성에 맞는 맞춤형 치료법을 개발하고 있다.

폐암은 정말 골치 아픈 병이다. 지난 세기 폐암은 전세계적으로 암 사망 1위를 차지했고, 최근 국내에서도 남성 암 환자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 매년 1만3천여 명이 새로 폐암 진단을 받고, 1만 명 이상이 숨진다. 본격적인 폐암 치료가 시작된 지도 반세기를 넘어섰지만 완치율은 좀처럼 높아지지 않고 있다. 1960년대 초반 완치율은 6~7%, 지금도 11~12%밖에 안 된다.

수술, 방사선요법, 항암화학요법 등의 한계를 드러낸 셈이다. 결국 폐암 치료의 근간을 바꾸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 경북대 호흡기내과 박재용(51) 교수는 유전자를 이용한 '폐암의 맞춤진단 및 진료'라는 패러다임의 선두 주자다.

◆폐암 관련 유전자 다형성, 세계 최초 규명

'캐스페이스(Caspase) 유전자의 다형성이 폐암 환자의 수술 후 예후를 결정하는 주요 유전인자임을 세계 최초로 규명했다.' 지난해 박 교수의 이 논문은 임상종양학 분야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학술지인 미국임상학회지(Journal of Clinical Oncology)에 실렸다. 세계 최고 학술지 중의 하나에 '세계 최초로 규명한' 논문이 실렸다니 놀랍다. 하지만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연구실에서 박 교수를 만나 던진 첫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박 교수의 설명을 조목조목 옮겨본다. "먼저 세포가 죽는 방법부터 알아야 합니다. 크게 두 가지죠. 괴사와 고사입니다. 괴사는 외부적 원인에 의해 세포가 사멸하는 수동적인 죽음이고, 고사는 수명을 다한 세포가 스스로 사라지는 능동적 죽음입니다. 바로 이 자멸사가 암 세포 치료와 직결돼 있습니다."

유전자의 '다형성'은 변이와는 조금 다르다. 결정적인 결함을 뜻하는 변이와 달리 다형성은 미세한 차이다. 키가 크고 작고, 술을 잘 마시고 못 마시는 정도의 차이. 캐스페이스는 앞서 말한 자멸사를 일으키는 유전자인데, 캐스페이스가 제 역할을 잘 할수록 암 세포가 자멸사를 잘하게 된다. 문제는 캐스페이스도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것. 즉 캐스페이스 유전자의 다형성이다.

"암 수술을 받고 나면 암세포를 거의 대부분 제거한 셈이죠.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은 세포 단위의 암이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자멸사 유전자가 활성화돼 있다면 암 세포가 저절로 죽어서 암 재발이 없을 겁니다. 바로 이것을 연구하는 게 제 일입니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든 노력

원래 박 교수는 소화기내과를 전공했다. 그의 표현대로 '우연한 기회'로 교수직을 맡는 과정에서 호흡기내과를 하게 됐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폐암 환자는 적었고 그만큼 관심도 떨어졌다. 당시 경북대병원 호흡기내과를 찾는 폐암 환자는 1년에 40명가량. 지금은 1년에 500명가량이 찾는다. "한강 이남에선 가장 많습니다. 그만큼 환자도 늘었고, 병원에 대한 믿음도 커졌기 때문이죠."

레지던트까지 소화기를 공부하던 그가 갑작스레 호흡기를 맡았을 때 당황스럽지 않았을까? "공부했죠. 책 보면서 혼자 공부했습니다." 그는 당구 700점을 친다. 아마추어 중에는 상당한 고수다. 그는 당구도 책을 보며 배웠다.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기에 학창시절 일본어로 된 당구교본을 보면서 연습했던 기억이 납니다. 공부하고 연습하니까 실력이 쑥쑥 늘더군요."

유전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1995년 미국 연수를 가게 됐는데, 우연히 네이처에 실린 한 페이지짜리 유전자 관련 논문을 봤습니다. 당시 유전자 치료의 세계적 대가 중 한 명이 제 편지를 보고 초청을 해서 관련 분야를 공부하게 됐습니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유전자를 이용한 치료법은 흥미로웠지만 실현 불가능했다. 처음 인간 게놈프로젝트가 완성된 뒤 질병 정복의 날이 멀지 않았다고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질병의 원인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만 깨달았을 뿐 아직 유전자 치료는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일 뿐이다. 2년 만에 그는 방향을 바꿔서 유전자 다형성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2002년 첫 SCI급 논문을 발표했다.

5년가량 유전자 다형성 연구에 매달린 결과물. 반응은 뜨거웠다. 첫 논문은 지금까지 무려 103번이나 전세계 학자들이 인용했고, 당시 발표했던 2개의 다른 논문도 관련 분야 전문가들 사이에선 유명세를 떨쳤다. 지금까지 그가 발표한 SCI급 논문은 무려 102편. 지역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적이다. 이미 2006년 캐스페이스 유전자의 기능을 세계 최초로 밝혀낸 논문도 발표했다.

◆맞춤치료를 목표로 지금도 연구 중

그의 연구는 '맞춤치료'에 목표를 두고 있다. 가령 캐스페이스 유전자의 다형성을 통해 특정 환자의 폐암이 재발할 가능성을 예견할 수 있고, 그에 맞춰 치료법을 달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미 그는 유전자를 분석해서 20~40년 뒤 폐암 발생 위험도가 높은 사람을 가려낼 수 있는 유전자 진단키트와 폐암의 조기진단용 유전자 진단키트를 개발했다. 또 최근에는 항암화학요법이나 방사선치료의 부작용과 함께 얼마나 효과를 볼 수 있는지를 예측할 수 있는 유전적 인자도 찾아냈다. 끊임없는 연구의 빛나는 결과물이다.

처음 연구를 시작했을 때, 주위의 지원은 거의 없었다. 연구실을 차릴 당시만 해도 빚을 내서 장비를 구입해야 할 정도였다. 지금은 '폐암의 맞춤진단 및 표적치료제 개발'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막대한 연구비를 지원받고 있다. "제가 학회에 갈 때마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국가가 고맙다'는 겁니다. 비록 환자를 치료하며 연구에 매달리는 게 쉽지 않지만 그만큼 큰 보람도 느끼게 됩니다."

전국에서 환자들이 자신을 믿고 찾아올 때 고마우면서 보람도 느낀다는 박재용 교수. 그런 그도 안타까울 때가 많다. "서울 가면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다가 치료시기를 놓칠 때 정말 안타깝습니다. 병원에 따라 의사의 등급이 매겨지는 현실도 바꿔야 합니다. 경북대병원에서 치료하지 못하는 환자를 서울에서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남 모르는 치료 비법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의사가 아닙니다. 지금은 환자를 위해 누구나 치료법을 공유합니다." 노력이 바탕이 된 실력을 갖췄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박 교수는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폐암과 관련한 유전자 다형성 중 캐스페이스는 극히 일부다. 앞으로 20여 개의 유전자 다형성을 추가로 밝혀내 꾸준히 논문으로 발표할 계획이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설 때 '무궁무진한 사람'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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