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군 가산면 학산리 유학산. 학이 노닐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답게 산세는 유려하며, 골짜기는 쉬이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르다. 칠곡군이 펴낸 유학산 안내도에는 봉우리 이름도 없이 해발고도에 '고지'라는 명칭을 붙여놓았다. 가장 높은 839고지에서 서쪽으로 줄기를 뻗어 837고지에 이르고, 다시 서남으로 가파르게 꺾여내리며 793고지와 674고지를 지나 다부리로 내려앉는다.
고지를 이어주는 능선길을 따라 서쪽 산 아래로 내려서면 그 곳에 다부동전적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동서로 4km 가량 줄기를 뻗은 유학산은 대구에서 볼 때 북쪽 병풍인 셈이다. 서쪽으로 낙동강을 지나면 구미 건너편에 금오산이 있고, 동남쪽으로 가산을 지나 팔공산으로 이어지는 그런 줄기다. 유학산과 가산 사이에 난 좁은 띠처럼 생긴 길목이 안동에서 대구를 잇는 통로가 된다.
때문에 서북쪽에서 올 때 대구로 바로 닿을 수 있는 목덜미에 놓인 셈이다. 유학산은 바로 그런 이유로 1950년 8월과 9월 숱한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은 최대 격전지 중 하나가 된다. 60년이 흘렀건만 아직 그들의 원혼은 산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유학산을 찾아간 날, 안개 구름이 온 산을 뒤덮고 있었다. 마치 그 때의 포연이 자욱한 듯이. 유학산을 꿰뚫은 탐사로는 하나 밖에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능선길 외에는 워낙 산줄기가 가파르기 때문에 다른 등산로를 낼 수가 없다. 원래 산을 오르는 길은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79번 도로를 따라 왜관으로 넘어가는 중에 오른쪽에 난 좁은 길을 따라 산자락으로 내려선 뒤 거기서 동북쪽을 바라보며 등산로를 타는 것이다. 하지만 산 아래에서 3.5km가 넘는 길을 계속 올라야 한다. 경사도 적잖이 급하다.
그래서 택한 길이 팥재주차장에서 오르는 코스다. 79번 도로를 타고 왜관쪽으로 넘어가다보면 오른쪽으로 구미로 가는 좁은 길이 나온다. 잠시 차를 달리면 유학산휴게소(팥재주차장)을 만날 수 있고, 거기서 도봉사로 오르면 바로 유학산 최고봉인 839고지로 가는 길을 잡게 된다. 팥재주차장에서 팔각정이 있는 839고지까지 1.7km. 거리는 짧지만 코스는 상당히 가파르다. 주차장에서 도봉사까지 콘크리트 포장이 돼 있지만 인파가 몰릴 때엔 이 길도 걸어서 올라야 한다. 도봉사에서 정상까지는 1km.
바위 투성이 산길을 기어오르다시피 걸어서 정상에 오르자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바로 아래에서 봐도 팔각정이 보이지 않을 만큼 구름으로 뒤덮였다. 남쪽 사면에서 치고 올라오는 안개 구름은 바람을 타고 흐르듯이 비껴간다. 건너편 석산에서 들려오는 돌을 쪼는 '쾅쾅쾅'하는 굉음이 바로 곁에서 들리는 듯 하다.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60년 전 그 자욱한 포연 속으로 간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고지 탈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조용히 유학산 남사면을 오르고 있었다. 죽음으로 가는 길임을 알지만 누군가는 가야 할 길. 하루 밤에도 수백여 구의 시체가 쌓이는 이 곳 산에서 이튿날을 생각하는 것은 감정의 사치에 불과했다. 소대장도 화랑담배 껍데기에 이름을 적어둬야 할 만큼 급조된 병사들. 골짜기와 산줄기마다 넘쳐나는 시체들은 여름 뙤약볕과 숨이 턱턱 막히는 습기 때문에 금세 썩어들었다. 한바탕 포화가 빗발치고 나면 역겨운 화약 냄새가 온 산하에 가득했다.
사람의 감각기관 중 코가 가장 먼저 둔감해진다지만 시체 썩는 냄새만은 어쩌지 못했다. 전우인지 적인지도 구분 못하는 그 캄캄한 밤, 시체를 넘고 넘어 병사들은 다시 고지로 향했다. 미끄러지고 자빠지기를 수십 차례. 적들이 오르는 북사면과 달리 남사면은 깎아지르는 벼랑이나 다름없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돌릴 새도 없이 고지를 선점한 적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총알을 빗줄기처럼 쏟아지고, 수류탄은 우박처럼 산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외마디 비명도 없이 유학산 어느 이름없는 골짜기에서 병사는 숨을 거뒀다. 무려 아홉 차례나 밤낮을 바꿔가며 주인이 바뀐 그 곳. 40여 일 이어진 전투는 9월 24일에야 비로소 막을 내릴 수 있었다.
839고지에서 서쪽으로 837고지를 가는 길은 비교적 완만한 능선길. 좌우 줄기에 비해 완만할 뿐 오르고 내리기를 쉼없이 거듭한다. 길 양편에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구덩이가 파여있다. 칠곡군청 숲길조사원 이연진씨는 "최근까지도 국군에서 유해발굴작업이 이뤄졌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패인 구덩이는 깊이도 크기도 다르다. 하지만 어느 것도 가로, 세로 50cm가 채 안된다. 시신을 수습해 매장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은 그 상태 그대로 웅크린 듯 묻혔으리라. 그나마 능선 양편 몇 미터 안쪽에서 발굴이 이뤄졌을 뿐 그 아래쪽은 워낙 가파른 탓에 접근조차 힘들다. 유유자적하게 학이 노닐던 그 산은 이제 한이 묻힌 땅이 됐다. 이념과 정치는 이들의 죽음을 달래주지 못한다. 북에서 내려온 병사나 남쪽을 지키는 병사나 마찬가지다. 젊은 피를 묻어버린 이 땅에서 울음도 삼켜버릴 수 밖에.
839고지에서 마지막 674고지까지 약 5km에 이르는 구간에서 유해발굴터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처음엔 슬픔을 안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제는 끝나겠지했던 유해발굴터는 참으로 질기게 이어졌다. 도대체 얼마나 죽었기에. 시체가 땅과 나무를 뒤덮고, 그 위에 다시 시체가 덮혔으리라. 잊혀진 그들 위에 나뭇잎은 덮히고 흙이 쌓였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고지마다 수십길 낭떠러지 암벽이 자리하고 있다. 그저 내려만봐도 아찔한 저 산줄기를 타고 병사들은 올랐으리라. 바위 틈새에 뿌리를 내린 비틀린 소나무는 피가 뿌려지고 살이 찢겨나가는 그 아비규환을 고스런히 지켜보았다. 그 옛날 포화 속에도 살아남았을 그 노송은 이후로도 벌써 예순 번이나 새 순을 내밀고 가지를 키웠다. 이제 그 나무는 묵묵히 남쪽으로 가지를 뻗고 있다. 마치 수십 갈래 손을 뻗어 그 아래 잠든 원혼을 달래는 듯 하다. 뒤틀린 나무둥치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기도의 몸짓처럼 보인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칠곡군청 산림경영담당 최진영, 숲길조사원 이연진 054)979-6310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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