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남희의 즐거운 책 읽기]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 / 이병훈 /한길사

한여름에 떠나는 겨울나라 여행

투르게니예프와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묘사되는 러시아의 광활한 자연, 신과 인간에 대해 끝없이 번민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러시아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품었던 적이 있다.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와 가까웠지만 현대사 수십 년간 남북과 각각 미묘한 관계를 유지해온 러시아. 아직은 베일에 싸인 러시아 예술기행을 읽었다. 러시아문학을 공부한 이병훈의 『모스크바가 사랑한 예술가들』.

"아, 이 눈보라, 러시아, 밤, 그리고 철길! 이 모두가 행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러시아 작가 이반 부닌의 말이다. 러시아의 겨울은 러시아인의 존재적 근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혹독하고 긴 겨울을 이겨낸 그들은 광활하고 황량한 벌판에 자신들만의 독특한 정신문화를 창조했다. 그것은 인류의 문화적 지형도에서 가장 북방에 위치해 있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문화유산이다.

모스크바의 겨울은 혹독하기도 하지만 매우 아름답고 다채롭다. 러시아의 중요한 정신적 활동은 거의 모두가 겨울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겨울에 러시아를 여행하거나 살아봐야 그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여름의 모스크바는 편안하긴 하나 모든 것이 휴무 중인 관계로 무료하기까지 하다. 러시아가 자랑하는 발레'오페라'고전음악'연극'영화'미술전시회 그 밖의 각종 예술공연'서커스까지 겨울이 아니면 볼 수 없다. 대학도 여름이 되면 거의 모든 활동을 중지한다. 겨울이 와야 모든 강의와 연구가 열기를 뿜으면서 절정에 이른다.

86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의 고도 모스크바는 지금 인구 천만이 넘게 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고, 수많은 역사 유적지와 자연경관을 보존하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발전했다. 중국 상하이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도시 모스크바는 초현대식 건물과 고풍스러운 옛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어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역병과 기아, 폭동과 반란, 전쟁과 화재, 침략과 파괴, 혁명과 반혁명 등 러시아 역사의 모든 영광과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모스크바는 '러시아 영혼의 심장'이라 불린다. 지금 러시아는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모스크바의 물가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며, 권력이 정치에서 경제로 급속하게 옮겨가고 있다. 러시아의 가장 성스러운 도시 모스크바는 이제 가장 세속적이고 화려한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는 중이다.

보통 9월에 시즌을 시작해서 다음해 초여름에 막을 내리는 공연예술은 러시아가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예술공연이다. 연극'발레'오페라'콘서트 등을 감상하면서 기나긴 겨울을 보내는 수준 높은 러시아의 관객들, 극장을 꽉 메운 관객들과 표를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르는 사람들을 보며 러시아 공연예술의 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된다. 저자는 모스크바의 주요 박물관과 대학, 명소들을 방문하는데, 그 중에서 작가들의 생가 방문이 인상적이다. 19세기 러시아 귀족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톨스토이의 조부 볼콘스키 공작이 살았던 대저택, 사색에 잠겼던 자작나무 벤치와 작가가 살았던 소박한 2층집에서 위대한 작가이자 사상가였던 톨스토이를 회상한다. 높은 긍지를 지닌 의사이면서 작가이기도 했던 체호프의 멜리호보 집을 방문하여 체호프의 향기를 느껴 보기도 하고, 『닥터 지바고』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보리스 파스체르나크의 집을 찾아가기도 한다. 자스민 향기가 그윽한 파스체르나크의 집은 지바고가 라라와 함께 몇 날을 같이 보내는 바리키노의 집을 닮아 있다. 세계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모스크바의 명물 지하철, 러시아 민중의 애환'기쁨'삶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가 녹아 있는 러시아의 국민주 보드카, 팜므파탈로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러시아의 미인들, 아름다운 자작나무숲, 혁명과 자유를 노래한 시인과 예술가 등 러시아의 자연과 예술의 향기가 가득하다. 러시아 예술기행 완결편 『백야의 뻬쩨르부르그』도 얼마전 출판되었다.

(새벗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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