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배롱나무

요즘 거리나 공원에서 붉은색이나 자주색 꽃을 달고 있는 나무가 눈에 띄면 십중팔구 배롱나무다. 나무는 대개 봄에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광합성을 활발히 하기 때문에 잎이 무성한데 유독 배롱나무는 지금 꽃이 한창이다.

마치 뜨거운 태양에 대들기라도 하듯 뙤약볕 아래 꽃을 피웠는데 꽃이 100일을 간다고 해서 '목백일홍' 또는 '나무백일홍'이라고도 한다. 여름 초입에 피기 시작했으므로 꽃이 질 때는 이미 가을로 접어들었다는 신호를 주는 나무이기도 하다.

자세히 살펴보면 가지 끝마다 조그만 꽃봉오리를 소복이 달고 있는데 이것이 마치 팝콘 터지듯 꽃이 핀다. 꽃은 부드러운 한지를 오글오글하게 구겨 놓은 공예품 같다. 꽃봉오리가 한꺼번에 터지지 않고 차례로 터지기 때문에 한여름 100일 동안 꽃을 볼 수 있다. 줄기도 특이하다. 얼마나 매끈한지 마치 옷을 벗고 있는 모습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꽃이 간지럼을 잘 탄다고 해서 '간즈럼나무'라고도 하는데 실제 줄기를 간질여 보니 별 반응이 없고 오히려 손가락이 간지럽게 느껴진다.

그저 여름을 대표하는 관상수로만 여겼는데 알고 보니 선조들이 오래전부터 사랑했던 나무였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배롱나무는 부산진구 양정동 동래 정(鄭)씨 시조 묘 양쪽에 서 있는 노거수다. 수령이 약 800년이나 된 천연기념물 제168호다. 지역에서는 안동 병산서원 입구에 있는 것이 유명하다. 수령이 400년 정도 됐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문 원예서인 '양화소록'(養花小錄)을 지은 강희안(姜希顔)은 꽃과 나무를 9품으로 나누었는데 백일홍을 매화, 소나무와 함께 1품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비단 같은 꽃이 노을빛에 곱게 물들어 사람의 혼을 빼앗듯 피어 있으니 품격이 최고'라고 평했다. 또 서울 벼슬아치 집에 이 꽃이 여럿 보이더니 근래 대부분 얼어 죽었다며 관리 소홀을 나무라기도 했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도 '지난 저녁 꽃 한 송이 떨어지고/ 오늘 아침 한 송이 피어나/ 서로 백일을 바라보니/ 너와 더불어 한잔하리라'는 시를 남겼다.

이제 이 꽃을 볼 때마다 마음속에는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가 내린다. 더위를 함께하는 동반자, 배롱나무가 있으니 이 여름을 지내기가 훨씬 수월한 것 같다.

윤주태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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