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원태의 시와 함께]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심보선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

생에 대하여 미련이 없다

이제 와서 먼 길을 떠나려 한다면

질투가 심한 심장은 일찍이 버려야 했다

태양을 노려보며 사각형을 선호한다 말했다

그 외의 형태들은 모두 슬프다 말했다

버드나무 그림자가 태양을 고심한다는 듯

잿빛 담벽에 줄줄이 드리워졌다 밤이 오면

고대 종교처럼 그녀가 나타났다 곧 사라졌다

사랑을 나눈 침대 위에 몇 가닥 체모들

적절한 비유를 찾지 못하는 사물들 간혹

비극을 떠올리면 정말 비극이 눈앞에 펼쳐졌다

꽃말의 뜻을 꽃이 알 리 없으나

봉오리마다 비애가 그득했다

그때 생은 거짓말투성이였는데

우주를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진리가

어둠의 몸과 달의 입을 빌려

서편 하늘을 뒤덮기도 하였다

그때 하늘 아래 벗은 바지 모양

누추하게 구겨진 생은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였다

장대하고 거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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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라면 거듭되는 일상의 무기력과 피곤은 우리를 지치게 한다. 나이 들어가면서는 '내가 왜 살고 있지?'라는 근본적인 질문마저 놓쳐버린 지 오래인 듯, 다만 습관처럼 쳇바퀴 돌리듯 하루하루를 견디거나 소모(消耗)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노라면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 생에 대하여 미련이 없"어지기 마련이고…… 이제 와서 새로이 뭔가를 해 보려거나 먼 길을 떠나려 한다면, 시인의 말대로 일찍이 심장을 버려야 했을지도 모를 만큼 열정은 식어버렸다.

비록 생은 "누추하게 구겨진" 것이고,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일지라도, 우리는 오로지 삶이라는 실존을 통해서만 그 의미의 모래알들, 사금파리들을 모아 두터운 '문화'라는 퇴적층을 이루어 간다. 생은 존재와 관계들의 "적절한 비유"를 찾아가는 도정, 다른 말로는 '구도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장대하고 거룩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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