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경력이 짧아 내세울 것도 없는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 지 고민입니다." 사실 기자도 걱정스러웠다. 대구파티마병원 안과 박대진 과장은 이제 갓 불혹을 넘긴 아직은 젊은 의사다. 이 곳 안과 과장으로 재직한 지도 만 6년. 짧지는 않지만 연륜이 쌓였다고 보기엔 모자람이 느껴지는 시간이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은 오해를 부르고, 때 이른 실망은 후회를 낳는 법. 2시간을 훌쩍 넘긴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설 때 묘한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근거없는 선입견 탓에 슬그머니 낯이 뜨겁기도 했다. 박대진 과장은 속이 꽉 찬 가을 배추 같은 사람이었다. 노력의 대가를 알았고, 의사로서 묵직한 사명감을 품고 있으며, 무엇보다 행복해지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유럽학회에서 당당히 1위
지난해 9월 열린 유럽백내장굴절수술학회(ESCRS). 내로라하는 세계적 안과의사가 모인 자리에서 박 과장은 당당히 비디오시상(video awards) 1위를 차지했다. 비디오 내용은 자체 개발한 실리콘 재질의 링(ring)으로 '무봉합 양막이식술'을 시행해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장점들을 담았다. 얼핏 들어도 꽤 복잡해 보인다. 설명을 부탁했다. "양막은 태반의 가장 바깥층입니다. 제왕절개술을 통해 출산하는 산모의 태반을 통해 채취하는데, 이 양막이 눈에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눈에 난 상처를 빨리 치유해주는 놀라운 물질입니다. 반투명한 얇은 양막을 상처가 난 안구에 붙여놓으면, 각막을 보호하는 상피가 되살아나고 갖가지 염증도 치료해 줍니다."
안과 의사들은 양막의 효과에 대해선 이의가 없다. 다만 상처난 안구에 양막을 덮어씌우는 방법 탓에 사용을 꺼리는 경우가 있다. 양막을 안구에 붙이려면 실밥으로 봉합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상처난 각막을 대신해 양막을 영구적으로 이식하는 경우도 있지만, 빠른 상처 치유를 위해 임시로 양막을 덮어두는 경우도 많다. 일시적 이식 때엔 자칫 봉합하다가 오히려 안구 표면에 손상을 줄 수 있어 사용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다. 안전하게 양막을 덮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때문에 미국의 한 의사가 실밥으로 꿰매는 대신 플라스틱 링에 양막을 붙인 뒤 콘택트렌즈처럼 안구에 끼우는 방법을 개발했다. 양막 시술을 획기적으로 바꾼 놀라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쌌다. 일시적 이식이어서 여러 차례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국내 시판 가격이 100만원이었다. 게다가 양막을 지지하는 플라스틱이 딱딱해서 눈에 넣을 때 이물감이 심했다. 환자는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공부 외엔 욕심낸 적 없어
박 과장은 더 나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딱딱한 플라스틱이 아니라 말랑말랑한 실리콘에 양막을 덧붙여 안구에 바로 집어넣는 장치를 개발했다. 수도 없는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얻어낸 소중한 결과물이었다. 기존 제품보다 안구를 덮을 수 있는 면적을 훨씬 넓힐 수 있고, 그만큼 치료 효과도 크고 오래 지속됐다. 가격은 수입 제품의 5분의 1이 채 안됐다.
유럽학회에서 1위 수상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 셈이었다. "지난 2월 중앙대병원에서 열린 양막심포지엄에서 양막 링을 주제로 발표했습니다. 선배 의사 선생님들이 '해낼 줄 알았다', '안구 봉합술 하기 정말 싫었는데 고맙다'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 앞으로 돈도 많이 벌겠다며 우스개 섞인 질문을 건네자 "특허 등록도 안했다"며 손사래를 쳤다. 양막을 주문하면 링은 필요한 사람 누구나 무료로 주도록 업체측과 협의했다. 원래 어려운 이웃을 돕자고 시작한 일이었기 때문. "지난해 학회를 보고 다른 나라에서 비슷한 제품을 만들어 쓰고 있을지도 모르죠.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도 적은 부담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있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지만 공부 외에는 욕심을 내본 적이 없다. 고교 시절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던 그는 경북대 의대에 진학한 뒤에도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 파티마병원에서 수련의과 전공의 과정을 거친 뒤 곧바로 안과 과장이 됐다. 아직 전세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그는 스스로 "돈 욕심이 별로 없다"고 말한다. 경력이 쌓이면서 개원하자는 요청도 잇따랐다. 적잖은 연봉을 보장하는 경우도 있었고,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병원에서 동업하자는 제안도 들어왔다. 그는 자신이 할 몫이 따로 있다고 했다.
◆눈이 아닌 사람을 보는 의사
기억에 남는 환자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20대 여성 환자가 폭행을 당해 눈 안쪽 뼈가 부서진 상태로 병원에 왔습니다. 환자 어머니는 행여 실명할까봐 눈만 걱정하더군요. 그래서 말했죠. 눈은 책임지고 낫게 해드릴테니, 어머니는 놀란 따님부터 먼저 위로해 주라고." 다행히 환자는 무사히 퇴원했고, 일주일쯤 뒤에 어머니가 넥타이와 먹을거리를 싸들고 찾아왔다. 고이 접은 편지지 5장에 고마운 마음도 담았다. '놀란 마음에 아이의 상처 밖에 보지 못했는데, 선생님 덕분에 엄마로서 해야 할 역할을 깨닫게 됐습니다.'
촌지를 받은 적도 있다. "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던 아주머니였어요. 백내장 수술을 받았죠. 퇴원하고 외래 진료를 받으러 다니셨는데, 어느 날 오전에 진료를 받고는 오후 내내 저를 기다렸다가 병원 구석으로 데려가더니 꼬깃꼬깃 접은 5만원을 건네시더군요. 얼굴 꼴이 이게 뭐냐면서 잘 좀 챙겨먹으라고 하셨어요." 거절할 수 없었다. 감사하게 잘 쓰겠다며 고마움의 인사를 했다.
그는 환자와의 교감을 소중히 여긴다. 실력은 기본이고, 환자에 대한 예의는 반드시 갖춰야 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환자를 한 명의 소중한 인간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바라볼 때 비로소 그저 눈만 보는 게 아니라 눈을 통해 나타나는 여러 다른 질환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와 만난 환자들은 많이 고마워한다. 질병뿐 아니라 마음까지 다독거려주기 때문이다.
양막 링은 가장 최근에 거둔 성과일 뿐 다른 분야에서도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백내장에서는 합병증을 줄이고 빠른 시력 회복을 가져올 수 있는 치료법, 노안을 교정할 수 있는 다초점 혹은 조절성 인공수정체, 자가혈청이나 항염증약물을 조합한 건성안의 완치법 등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 중이다. "연구하는 게 즐겁습니다. 개원을 하면 그런 시간을 가지기 힘들겠죠." 행복하냐는 기자의 마지막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행복해지려고 노력했더니 점점 행복해지더군요. 그래서 지금은 행복합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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