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선비 정신'의 세계화

'딸깍발이'란 것은 '남산(南山)골 샌님'의 별명이다. 왜 그런 별호(別號)가 생겼느냐 하면, 남산골 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른 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쳐서 딸깍딸깍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 (중략) 겨울이 오니 땔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동지 설상(雪上) 삼척 냉돌에 변변치도 못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으니, 사뭇 뼈가 저려 올라오고 다리 팔 마디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온몸이 곧아 오는 판에, 사지를 웅크릴 대로 웅크리고, 안간힘을 꽁꽁 쓰면서 이를 악물다 못해 박박 갈면서 하는 말이 "요놈, 요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마는, 어디 내년 봄에 두고 보자."(이희승의 수필 '딸깍발이' 중에서)

살림살이는 비록 비루했지만 정신만은 꼿꼿했던 선비의 생활상을 가감 없이 그려낸 이희승 님의 '딸깍발이'는 학창 시절 애독 수필이었다. 조선시대 갓끈 떨어진 선비들이 주로 모여 산 곳이 남산 기슭 소위 남촌이었다. 반면 고관대작들은 북촌 즉 경복궁 부근에 거주했다. 그러니 이 남산골 샌님들은 빈곤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거의 거지 신세나 다름없었지만 죽어도 양반이라고 목숨 걸고 체면과 자존심을 지켰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을 치지 않고, 얼어 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는다고 했다. 소나기가 와도 팔자걸음을 걸어야 하고, 며칠을 굶어도 책만 읽을 뿐 돈 벌 궁리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더운 여름에도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속대발광 욕대규'(여름에 허리띠를 두르고 앉았으니 큰소리로 욕이 나온다)라며 속으로 고함칠 뿐 내색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상투를 자르려고 하자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며 목이 잘릴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르지 않겠다고 버텼다. 요즘 보면 시대에 뒤떨어지고 앞뒤 꽉 막힌 게 선비 같지만 그래도 조선을 지켜온 것이 '선비 정신'이다.

이 선비 정신이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세계화의 길목에 들어섰다. 수백 년간 가문의 전통을 고스란히 지켜온 집성촌의 가치, 그 '휴머니티'를 세계가 인정한 셈이다. 특히 이번에는 경북 2곳이 동시에 세계적 유산이 됐다. 정작 우리만 선비 정신을 모르고 폄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할 시점이다.

윤주태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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