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호자(40·대구시 달서구 월성동) 씨의 아파트는 작지만 깨끗했다. 65㎟쯤 되는 집의 거실 텔레비전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고 부엌 싱크대위에는 마른 행주가 걸려 있었다.
호자 씨는 "남편과 아들은 이제 살림꾼이 다됐다"며 웃었다. 심장과 폐를 동시에 이식해야 하는 병인 '아이젠멩거 증후군'을 앓고 있는 호자 씨는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턱턱 차오른다. 이런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건 남편 전영표(44) 씨와 아들 지훈(18)이 몫이다.
◆"아픈 몸보다 병원비 계산이 먼저 걱정"
호자 씨는 학창시절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소풍을 간 적도, 운동회 때 달리기를 한 적도 없다. 그러나 몸이 약해서 그런 것이라고만 여겼다. 학창시절엔 평생 자신을 괴롭힐 병이 지속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1992년 지훈이를 가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임신을 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고 아픈 몸을 내버려뒀다.
그러다가 결국 일이 생겼다. 아이를 낳기 직전에 대구의 한 대학병원에 갔는데 심장판막증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움직일 때마다 심장이 요동치는 게 병 때문이라는 사실은 아이를 낳을 때가 돼서야 깨달았다. 당시 병원에선 남편 영표 씨에게 "출산을 하면 아이와 아내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위험을 무릅쓴 호자 씨는 그해 겨울, 사내아이를 낳았다. 호자 씨와 아기 모두 목숨은 건졌지만 치료비가 문제였다. 호자씨는 "검사 한번 받을 때마다 30만원이 넘게 들었는데 이 정도면 우리 가족 한 달 치 생활비"라며 "병원에 입원해 있어도 아픈 몸보다 병원비 생각이 먼저 났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병원에서는 지속적으로 수술을 권했지만 호자 씨는 번번이 "다음에 하겠다"며 15년 넘게 미뤄왔다.
어려운 형편 탓에 병을 평생 안고 있던 호자씨. 결국 일이 터져버렸다. 호자씨는 6월 여름 감기를 심하게 앓았다. 대학병원에 갈 때마다 5만원이 넘게 나오는 진료비가 부담스러워 약국에서 약을 지어 먹고 꾹 참았다. 하지만 한 달이 가도 감기가 떨어지지 않아 큰 병원을 찾아갔더니 심장과 폐를 함께 이식해야 하는 '아이젠멩거 증후군'이라는 판정을 받은 것. 치료를 미뤄온 사이에 폐까지 병들어버렸다.
◆엄마 돌보느라 축구대회도 못 나간 아들
호자 씨는 "아들이라도 건강하게 자라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올해 고등학교 2학년인 지훈이는 축구를 가장 좋아한다. 요즘처럼 더운 날씨에도 일주일에 두세 번씩 운동장에서 공을 찰 정도로 축구 마니아다. 뙤약볕에 양팔이 시커멓게 그을린 지훈이는 학교 축구 동아리 주장을 맡고 있다.
지난달 24일은 대구지역 고등학교 축구 동아리들의 대항전이 있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날 호자 씨가 갑자기 아파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지훈이는 대회에 출전할 수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축구를 포기해야 했는데도 지훈이는 "괜찮다"며 웃었다. 지훈이에게 엄마는 항상 1순위이기 때문이다.
지훈이는 학교를 마치면 곧장 집으로 돌아온다. 방과 후에 PC방에도 가고 싶고, 친구들과 군것질을 하고 싶은 나이지만 아픈 엄마를 생각하면 평범한 일상은 포기해야 한다. 지훈이는 초등학교때도 그랬다. 아빠는 돈 버느라 바빠서, 엄마는 아파서 운동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지만 지훈이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이제 고등학생이 된 지훈이는 부모님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 급식비를 안내는 대신 친구들에게 반찬을 직접 나눠주는 일을 도맡았다. 호자 씨는 "우리 아들은 학교에서 돈 드는 일은 다 몸으로 때운다"며 가슴 아파했다.
◆낮에는 공장일, 밤에는 집안일하는 남편
영표 씨는 도금공장에서 2년째 근무하고 있다. 오전 6시 50분에 집을 나서 오후 8시까지 공장에서 열처리 일을 한다. 이렇게 일해서 한 달에 고정적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120만원 정도. 휴일도 없이 잔업과 야근까지 다해도 180만원을 겨우 번다. 호자씨가 수술을 하려면 2천만원 이상이 들지만 정부 지원금은 한 푼도 받을 수 없다. 영표씨가 3인 가족 최저생계비(111만919원)를 넘는 소득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만든 법은 호자 씨 가족에게 냉정한 잣대를 들이댈 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인터뷰하는 내내 땀을 흘린 호자 씨는 "근처 시장에 장을 보러 가는 것조차 힘에 부친다"며 "버스로 한 정거장 정도인 거리를 걸으려면 몇 번을 쉬어야 하는지 모른다"며 속상해했다. 다른 엄마들은 다 하는 일인데 자신은 아들과 남편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낮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한 영표 씨는 밤이 되어서도 쉴 수가 없다.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며 엄마 노릇까지 해야 한다. 사춘기를 겪을 틈도 없이 어른이 돼 버린 지훈이도 집안일을 거든다.
여름이 되면 다른 가족들은 도심을 떠나 피서를 가지만 호자 씨 가족은 휴가를 떠난 적이 없다. 병원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놀러 갔다가 혹시라도 호자 씨가 아프면 어쩌나 걱정이 돼 멀리 떠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욕심이 없는 지훈이라고 해도 소박한 소원은 하나 있다. 지훈이는 "엄마가 다 나으면 세 식구가 함께 피서를 갔으면 좋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황수영 인턴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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