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박완서 지음/현대문학

펴냄팔순 소설가가 바라본 자연과 사람살이

'요새처럼 흙의 생명력이 왕성할 때는 잡초 뽑기 말고도 수시로 마당이 나를 불러낸다. 일년초도 적당한 간격으로 솎아 줘야 하고 심지 않았는데도 건강하게 영역을 넓혀가는 머위, 돋나물 등 식용할 야채를 거두기도 한다. 다 나에게 맞는 육체노동을 시키고 마음을 행복하게 해주는 고마운 흙장난이다. (중략) 맨손으로 흙을 주무르다가 들어오면 손톱 밑이 까맣다. 외출할 일이 있으면 정성들여 손을 씻지만 대강 씻고 무심히 외출한 적도 없지 않다. 사람을 만날 때면 열심히 내 손을 테이블 밑으로 감추지만 속으로는 엉뚱한 상상력으로 비죽비죽 웃음이 나온다. 며칠만 나의 때 묻은 손톱을 간직하면 열 손가락 손톱 밑에서 푸릇푸릇 싹이 돋지 않을까.'

소설가 박완서 씨가 4년 만에 에세이집을 냈다. 올해로 등단 40주년이자 팔순을 맞은 지은이는 '아직 글을 쓸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 내 자식들과 손자들에게도 뽐내고 싶다'고 말한다. 이번 에세이집에는 자연에 대한 경이, 사람살이에 대한 깨달음, 세상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애정에 관한 글을 담고 있다. 또 이제는 무애(無碍)에 가 닿은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앞으로 몇 년이나 더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작가로서의 나의 새로운 다짐이 있다면 남의 책에 밑줄을 절대로 안치는 버릇부터 고쳐볼 생각이다. 내 정신상태 내지는 지적 수준을 남이 넘겨짚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도 일종의 잘난 척, 치사한 허영심,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폐증이라고 생각되자, 그런 내가 정떨어진다. 자신이 싫어하는 나를 누가 좋아해주겠는가.'

지은이는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 읽은 책, 뉴스 등을 통해 떠오른 생각들을 부드럽고 온화하게, 그러면서도 빈틈없는 문장으로 풀어놓고 있다. 267쪽, 1만2천원.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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