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 선생의 생가이면서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사용됐던 임청각(보물 제182호)의 소유권이 석주 선생의 망명 100년 만에 문중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석주 선생은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1월 가족들을 이끌고 임청각을 떠나 중국 만주 망명길에 올라 독립운동에 여생을 바쳤다. 이후 1930년대 초에 일제가 호적제를 시행하면서 재산권 행사를 위해 반드시 호적을 만들어야 했으나 석주 선생과 아들, 손자 등은 일제 치하의 삶을 치욕으로 여겨 끝까지 호적을 만들지 않았고 결국 고성 이씨 집안의 다른 파(派) 주손 등 4명 앞으로 임청각 건물과 땅의 소유권이 넘어갔다.
이후 이들이 숨지고 후손들이 70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소유권 문제가 복잡하게 얽혔으며 석주 선생의 증손자인 이항증(70) 씨가 나서 연락되지 않는 소유자 후손들을 찾아 이들을 상대로 10년이라는 긴 법적 절차를 거친 끝에 4일 서울중앙지법으로부터 건물에 대한 소유권을 종중으로 한다는 확정판결을 받아낸 것이다.
이 씨는 "80년 만에 석주 할아버지가 태어나신 집을 문중 명의로 옮기게 됐다. 집 주인 명의자의 후손들을 찾아다니느라 10년을 헤맸는데 이제야 좀 쉴 수 있을 것 같다"며 "80년 만에 집안의 종택을 문중 소유로 돌려놓을 수 있게 돼 후련하면서도 증조 할아버지께 못내 죄스러운 마음"이라고 했다.
해방 이후 이미 독립운동가의 집안이었던 임청각 후손들은 종손의 자결, 은거 등으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져 종택의 소유권을 정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씨는 조부가 해방 전인 1942년에 나라를 되찾지 못한 울분을 참지 못해 자결하고 아버지마저 한국전쟁 중에 죽는 등 조상들이 잇따라 비운을 겪었다. 이 때문에 이 씨는 고아원을 전전하는 처량한 신세가 됐고 조상이 살던 임청각의 소유권은 고사하고 그 집이 조상의 집이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랐다.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세월이 흘렀고 이 씨가 안동 임청각의 소유권이 자신의 직계 조상이 아닌 4명의 소유로 돼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불과 10여 년 전. 이 씨는 "죽기 전에 독립운동에 몸바친 조상이 사셨던 집의 소유권을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며 "본격 법적 절차에 나섰지만 소유권 이전은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닥쳤다"고 했다.
지난 1990년에 장자 단독 상속에서 남녀 차별 없는 균등 상속으로 상속법이 바뀌면서 소유권 이전을 위한 동의를 받아야 하는 사람만 무려 68명에 이르렀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수소문해 동의를 받아내기를 8, 9년. 61명은 소재를 파악해 법적 조치를 취했으나 나머지 7명은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거나 생사 여부가 명확하지 않았다. 결국 이들 7명을 상대로 소유권 보존 등기 말소 소송을 낸 이 씨는 4일에야 승소 판결을 받아 비로소 10년에 걸친 긴 여정을 어렵사리 끝냈다.
이 씨는 "할아버지 집을 문중 앞으로 되돌리는데 걸린 10년 세월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며 "문중 소유로 바뀌기는 하지만 결국 조상들이 피 흘리며 지키려 했던 이 나라의 재산이 될 것"이라고 했다. 종중의 손으로 돌아온 임청각은 조선 중종 때인 1519년에 지어진 전형적인 조선시대 종갓집 전통한옥으로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해 모두 9명의 독립지사를 배출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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