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철저하게 '경쟁의 원리'가 적용되는 국가다. 도시도 예외가 아니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삶의 질이 위협을 받게 되면 주민들은 미련 없이 '새로운 도시'를 찾아 살던 곳을 떠난다.
한국이나 일본, 유럽의 전통 도시처럼 주민들의 정주의식이 높지 않은데다 미국의 성장이 미지의 땅을 향한 '개척의 역사'인 때문이다.
디트로이트는 뉴욕과 시카고 등에 이어 한때 미국 내 4대 거대 도시였다. 하지만 자동차 산업이 몰락하면서 200만의 인구가 지난해 기준 90만 명의 군소도시로 전락했다. 시 당국은 올해를 지나면 80만 명 선으로 인구가 감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희망'은 '절망의 끝'에서 나온다고 했듯이 디트로이트는 뒤늦은 생존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도시를 줄이자
"10년 전 70만달러를 주고 식당을 구입했지만 지금은 20만달러에 팔려고 해도 사려는 사람이 없어요. 얼마 전 10만달러에 사겠다는 사람이 찾아왔는데 식당 주류 허가를 받는 데만 10만달러를 줘야 하는데 참…."
디트로이트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대구 출신의 이정선(50) 씨. 점심 식사를 위해 찾아간 식당은 150석이 갖쳐져 있었지만 테이블은 모두 비어 있었다.
그녀는 "5년 전만 해도 예약을 하지 않으면 식사를 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지엠과 크라이슬러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지금은 매출이 20%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한숨을 쉬었다.
인구는 줄고 빈집이 늘면서 디트로이트시의 데이브 빙 시장은 지난해 '시 규모 축소'를 발표했다.
효율적인 도시 운영을 위해 360㎢ 규모의 시 영역을 실사를 통해 줄이자는 방안이다. 빙 시장은 브리핑을 통해 "도심을 축소하지 않으면 도시 전체가 붕괴될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도심 규모가 줄어들면 외곽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이 높아질 것"이라고 밝혔다. 외곽 지역 주민들이 다른 도시로 편입되면 현재보다 좋은 행정 및 치안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논리다. 실제 디트로이트는 인구가 줄면서 전체 도시권역 면적의 27%가 유휴지로 변해 있다. 100년의 자동차 왕국, 디트로이트로서는 '치욕'적인 일이지만 도심 축소 방안은 시민들 사이에서 진지한 의견 수렴이 진행 중에 있다.
부동산 매니저인 게이슨 브라운 씨는 "인구가 줄면서 지난 2003년 평균 9만달러에 이르던 주택가격이 2만달러 수준으로 폭락한 상태"라며 "방치되는 빈집이 계속 늘면서 이를 헐고 도심 농장을 유치하는 방안도 시도되고 있다"고 말했다.
디트로이트 시의회 또한 스트립 클럽에서 술 판매 합법화를 추진하고 있다. 퇴폐 영업의 온상이라며 추방에 애써 왔지만 스트립 클럽에서 한 해 400만달러의 수입과 7천여 개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들은 궁지에 내몰린 시 정부가 내놓은 고육지책일 뿐 디트로이트의 생존을 담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지엠과 크라이슬러의 구제 신청 이후 비스테온(visteon), 메탈딘(metaldyne) 등 대형 부품업체들의 파산보호 신청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재기의 몸부림
디트로이트 몰락의 원인은 간단하다. 자동차에만 의존해온 단순한 산업 구조 탓이다.
미국 내 다른 도시들이 IT와 바이오 등 첨단 산업 유치에 나설 때도 디트로이트는 오직 '자동차'에만 의존해 왔다. 특히 자동차 시장이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카 등으로 재편을 시작할 때도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업체들은 휘발유를 잡아먹는 8기통 대형차 생산에만 안주해 왔다.
디트로이트 코트라 무역관에 근무하는 크리스 씨는 "자동차 산업의 쇠퇴는 강성 노조도 원인을 제공했다. 회사의 경영 상태와 무관하게 고임금을 요구해 왔고 이는 일본이나 한국에서 진출한 자동차 업체들이 현지 공장을 세울 때 디트로이트를 버리고 앨라배마와 조지아주를 선택한 또 다른 배경이 됐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생존에 내몰린 디트로이트는 뒤늦은 재기 노력에 나서고 있다.
주정부는 지난 2008년 신성장 산업으로 '대체 에너지'와 '영화 산업'을 선정해 집중 육성에 나서고 있다.
대체 에너지 개발 프로젝트 중 하나로 전기 자동차의 차세대 베터리 개발에 14억달러를 쏟아붓고 있으며 관련 기업 투자 유치를 위해 미국 최초로 지방세와 주정부세를 면제해주는 르네상스 지구 35개를 선정했다.
또 영화산업 육성을 위해 지난해 4월, MGM 카지노 빌딩을 촬영 스튜디오로 개조했고 폐쇄된 지엠 자동차공장을 할리우드 영화 제작소로 사용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파격적인 세제 혜택의 영향으로 지난해 이후 디트로이트 시는 70개가 넘는 영화와 TV 현지 촬영을 성사시켜 4억3천만달러를 유치했다.
지엠을 비롯한 자동차 업체들도 '그린 정책'(Green Strategy)을 추진 중이다. 대표적인 프로젝트가 올 11월 출시를 목표로 개발 중인 지엠의 전기충전 자동차 '시보레 볼트'로 지엠은 2017년까지 50개 차종의 4분의 3을 하이브리드로 가져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디트로이트의 몰락을 멈추고 재기의 발판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전기자동차 분야는 일본, 바이오 산업에서는 보스턴과 샌디에이고가 한발 앞서 있고 영화 산업 유치를 위한 제2의 할리우드 전략도 세제 혜택을 빼고는 모든 부분에서 LA의 벽을 넘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켄터키대 경제학과 기안 프레드한 교수는 "디트로이트는 성장 산업이 부족한 것도 문제지만 우수한 인재들이 도시를 떠났다는 점이 더 큰 문제"라며 "범죄율이 높고 주거환경이 좋지 않아 도시 성장을 위한 유능한 인력을 불러모으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며칠간 둘러본 디트로이트의 현실은 말기 암 환자와 비슷했다. 조기 진단과 치료 시기를 놓친 채 희망없이 수술대에 오른 상태다. 생존을 하더라도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도시의 비참한 현실. 디트로이트를 떠나며 첨단산업은 '수도권'에, 전통 제조업은 중국 등 후발 국가에 밀려 성장 동력을 잃어버린 한국 지방 대도시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이재협기자 ljh2000@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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