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여 전 대구 수성구 범어동 주상복합아파트(전용면적 143㎡)를 7억3천여만원에 분양받은 이기철(가명·44·회사원) 씨는 요즘 피가 마른다. 프리미엄(시세차익)을 노려 계약을 한 그는 처음 한두 달 1천만원 안팎의 프리미엄이 붙었지만 더 오르면 팔겠다는 생각에 그냥 갖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매매가가 분양가 이하로 떨어졌고, 매수자도 없다. 늘어나는 것은 빚뿐이다. 마지못해 입주를 결심했지만 살던 아파트마저 팔리지 않고 있다. 이 씨는 "대구의 핵심지역이며, 사 두면 한몫 잡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로 대출을 받아 계약을 했다"며 "8개월째 이사를 하지 못하고 있으며, 한 달 이자만 220여만원을 물고 있다"고 허탈해했다. 게다가 분양받은 아파트는 물론 살고 있는 아파트 값도 떨어졌다. 새 아파트는 분양가보다 8천만원, 살고 있는 아파트(수성구 만촌동)는 그 사이 3억4천만원에서 2억7천만원으로 7천만원 하락했다. 손에 쥐어보지도 못한 1억5천만원이 꿈처럼 사라진 것. "가족의 수입이라곤 제 월급 350만원이 전부입니다. 초교 5학년과, 중학교 2학년 아이들의 학원과외를 중단시켜야 했고, 외식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두 채를 갖고 있지만, 사는 것은 기초생활수급자 수준입니다."
◆아파트 덫에 걸린 '하우스 푸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본격화된 아파트 거래 침체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치닫고 있다. 기존 주택은 가격이 떨어진 것은 물론 팔리지 않고, 새 아파트에는 입주를 못 해 빚더미에 허덕이는 중산층의 비명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아파트가 안정적인 중산층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아파트를 사면 엄청난 불로소득을 가져다줬기 때문에 아파트는 서민과 중산층에게 '로망'이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전후로 '아파트 불패 신화'가 붕괴되고 있다. 이 씨처럼 아파트를 가진 하류층, 이른바 '하우스 푸어'(house poor)가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 값은 떨어지고 대출이자는 올라 은행에 비싼 월세를 내고 사는 신세이다. 얼마 전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0.25% 포인트 올린 것을 시작으로 예상되는 단계적인 금리 인상은 하우스 푸어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대구 달서구 상인동 주부 유인영(가명·40) 씨는 1년 전 수성구의 7억7천여만원짜리 미분양 아파트를 계약했다. 중도금 선납 할인 등 '파격 분양 조건'과 경기가 좀 나아지면 아파트 값이 오를 것이란 생각에 남편을 졸라 4억원이 넘는 빚을 내 새 아파트에 입주했다. 좀 살다가 값이 오르면 되팔겠다는 생각도 깔렸다. 하지만 살던 집이 팔리지 않고,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조차 장사가 예전만 못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월 218만원)를 갚기조차 버겁다. 유 씨는 "아파트 때문에 부부싸움도 잦고 애꿎은 아이들만 들볶는 일이 늘었다. 한 달 번 돈이 거의 몽땅 은행으로 들어간다. 생활비는 친정에서 빌려 쓰고, 조만간 살던 집을 전세 놓고 시댁에서 더부살이를 할 생각"이라고 울상을 지었다.
2005년 12월 분양 당시 대구 최고의 분양가와 95% 안팎의 계약률을 기록했던 범어동 A주상복합아파트. 이 단지는 높은 계약률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2월 입주가 시작됐지만 절반 정도가 비어 있는 상태다. 주변 금융회사와 부동산중개업소 등에 따르면 이 단지 계약자 중 70~80%가 대출을 받았으며, 살던 집을 처분하지 못해 입주를 못 하는 경우가 300여 가구에 이른다. 이들 중 상당수는 대출금 이자를 갚지 못해 신용불량 위기에 놓였다는 것. 범어동 B공인중개업소 대표는 "이 단지의 한 '라인'의 절반 정도가 매매나 전·월세로 나와 있다. 대부분 살던 집을 처분하지 못한 경우"라고 전했다.
◆부동산버블 붕괴되나
2000년대 부동산 폭등은 가계부채로 만든 일종의 거품이다. 국내 가계소득은 500조원인데 가계대출은 700조원이나 된다. 2006년 이후 빚을 지고 아파트를 구입한 가구는 전국적으로 159만5천여 가구에 이른다. 아파트를 사면 돈을 번다는 심리가 확산되면서 '묻지마 투자'가 늘었다. 단기적인 경기부양에 급급한 정부, 부동산담보대출과 프로젝트 파이낸싱(PF)으로 재미를 본 금융회사, 선분양제로 땅에 깃발만 꽂으면 돈을 벌 수 있었던 건설사, 불로소득을 노렸던 투자자들이 '아파트 광풍'을 만들어 낸 것이다.
많은 경제전문가들은 버블이 꺼지면서 아파트 값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대구 A대학 부동산학과 모 교수는 "지방은 물론 '강남불패'의 주역인 서울 강남지역에서도 거래 침체가 장기화되고 매매가격이 떨어지고 있다"며 "비정상적인 아파트 값, 가계부채 증가와 금리인상 전망 등이 낳은 당연한 결과다. 어쩌면 지금이 버불 붕괴의 시작일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의 경우 아파트 값은 크게 하락했다. 부동산114 대구경북지사 조사에 따르면 2007년 이후 3년여 동안 대구의 아파트 매매가 및 전세가는 각각 6.31%, 1.76% 떨어졌다.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는 부동산버블이 꺼지면서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원인이 됐다. 하지만 한국은 엄청난 자금을 투입해 미분양에 허덕이는 건설업을 지원해 인위적으로 부동산가격을 유지했다. 이제는 이 같은 비정상적인 부동산정책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부동산가격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정부가 얼마 전 총부채상환비율(DTI)과 담보인정비율(LTV) 규제 완화 등을 내용으로 한 부동산 거래 활성화 정책을 발표하려다 잠정 보류했다. 단기적으로는 거래 활성화에 도움이 되겠지만 가계부채를 더욱 늘리고 장기적으로는 집값 안정기조를 해칠 수 있다는 반대 의견이 재정경제부 등 관련 부처에서 제기됐기 때문이다.
아파트의 덫에 걸려 막차를 탄 '하우스 푸어', 그들은 아파트공화국이 만들어 낸 안타까운 현실이다.
김교영기자 kim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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