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서 헌법 개정 논의가 꿈틀거리고 있다. 한나라당에서 지방선거 참패와 새 지도부 선출, 이명박 정부의 임기 후반부 진입, 그리고 제헌절까지 여러 가지로 절묘한 시점에서 개헌론이 또다시 제기되고 있다. 우리 헌법은 1948년 제정 이후 모두 9차례나 개정됐지만 1960년 4·19혁명 이후와 1987년 6월 항쟁 이후의 개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집권 연장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가슴 아픈 기억을 떠올린다.
현재 정치권에서 제기하고 있는 개헌의 가장 큰 명분은 이른바 '1987년 체제'의 극복이다. 현행 헌법은 1987년에 개정된 이후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획기적으로 공헌을 했지만, 지금은 5년 단임 대통령제에 따른 권력 집중과 대통령을 쟁취하기 위한 무한 정쟁 등으로 우리 민주주의가 한 단계 도약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5년 단위의 대선과 4년 단위의 총선 및 지방선거 때문에 생기는 국력의 낭비도 그 명분으로 덧붙여 거론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정치권은 물론 사회 전반에 개헌의 필요성이 광범위하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개헌의 시기와 방식 등에 대해 여야 간에 합의만 이루어진다면, 이후의 개헌 논의는 급물살을 탈 것으로 전망된다. 형식적인 의미에서만 본다면, 개헌은 국회에서 정치적 절충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국민적 동의를 거치면 그만이다. 그러나 헌법이 우리 사회를 총체적으로 규제하는 최고의 규범(規範)이고 헌장(憲章)이라는 점에서 적지 않게 걱정이다.
첫째, 개헌 시기를 정한다는 것 자체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적기(適期)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향후 정치 일정을 고려할 때, 내년부터는 내후년의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 일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개헌 논의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행히 여야 대표가 모두 다가오는 정기국회가 개헌의 적기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여야 합의로 국회에 헌법개정특위를 구성해서 국민적 논의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한국적 상황에서 개헌은 곧 권력 구조 개편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령 그것이 명분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눈에 맞추어 조준돼야 한다. 권력 구조 개편과 관련해서 정치권에서 두드리고 있는 셈법이 여당과 야당이 다르고 친이와 친박이 상반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국민은 지난 세월 숱한 개헌을 지켜보면서 그때마다 정치권에서 둘러댔던 명분에 일말의 진실을 기대했었다. 지금은 배신의 쓰라림을 반복적으로 달래 왔던 그때 기억에 단지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특정 방향의 개헌을 연결고리로 해서 이른바 세력 규합(?)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개헌이어서는 안 된다. 특히 지방선거 패배 이후 여권을 중심으로 기지개를 펴고 있는 보수대연합론 등이 그것이다. 여권의 개헌론에 대해 야권 일각에서 "꼼수와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점을 상기할 때, 정치적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위장되었던 '발췌개헌'(1952)의 악몽이 떠오른다.
정치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개헌의 명분에는 모두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장장 23년이란 세월을 견뎌왔던 '1987년 체제'를 극복하려는 우리의 마음가짐은 보다 당당해야 한다. 정파적 이해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계파적 이해관계에 얽매인 당시 정치권에 대해 "변통(變通)하는 것은 고금(古今)의 통의(通誼)다"라고 일갈했던 율곡(栗谷) 선생님이 요즘처럼 그리운 적이 없다.
윤순갑 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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