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지금부터 내가 어떻게 하는지 네 눈깔로 똑똑히 봐라. 오늘 내 결판을 보겠다. 이 불효막심한 놈아, 이 아비가 어떻게 죽는지 잘 봐라. 네 놈이 두 눈으로 빤히 보는 앞에서 내가 죽어주마. 네가 믿는 사교는 낳고 길러준 아비어미는 없고 하늘에 천주만 아비라고 하니, 이 아비가 죽는 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143쪽-
천주교(당시는 서학(西學)으로 불렸다)가 조선에 들어왔을 때, 사대부 이벽(1754∼1786)은 이를 통해 새 세상을 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벽은 '천주냐 아비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아버지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단순히 아버지 한 사람의 반대가 아니라 경주 이씨 문중의 반대, 온 나라 전체가 반대했다. 이벽은 아버지를 죽일 수 없었고, 천주를 버릴 수도 없었다.(여기서는 천주를 종교가 아니라 신념 혹은 이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버지와 천주 사이에는 타협점이 없었다. 이벽은 '절충이란 장사꾼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단언했다. 신념이란 본래 절충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날카롭고, 그래서 아름답고 또한 불행하다. 이벽은 30대 초반의 나이로 죽었다. 공식적인 사망 원인은 '괴질'이었다. 아버지와 가문(사회적 질서)은 그의 죽음을 '순교'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벽은 죄를 회개하고 죽은 사람이어야 했다.
당시는 주자학의 시대였다. 주자학의 체제는 서학(천주교)을 용납할 수 없었다. 서학을 받아들였던 젊은 선비 이벽과 정약용은 주자학의 질서로부터 집요한 공격을 받았다. 반대파들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요망한 서학에 빠진 자들'이라고 맹공격했다. 서학에 발을 담갔던 사람들은 살기 위해 동지들을 고발했고, 탄핵했다.
이벽과 함께 서학을 받아들였지만 정약용(1762∼1836)은 달랐다.
'나는 체제를 부정하려는 혁명가가 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었다. 내 삶의 한계는 늘 체제 경계선 안쪽에 있었다. 최고 권력인 임금을 설득하고, 임금을 움직여, 좀 더 나은 쪽으로 개량해가려는 것일 뿐이었다. 이벽은 임금을 체제의 부속품이라고 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그는 무엄했다. 임금은 체제였다.' -129, 130쪽-
'나는 성균관 공부를 완전히 등한시할 배짱도 없었다. 강렬한 출세의 욕망이 그걸 원치 않았다. 위태롭게 체제의 공부와 반체제의 공부를 왔다갔다 했다. 정조의 칭찬과 이벽의 인정 사이에서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83쪽-
정약용은 열심히 공부해서 급제하고 싶었다. 더불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정(서학에 대한 신념)도 버릴 수 없었다. 정약용은 체제에 반하는 죄를 지었고, 살아남기 위해 죄를 빌었고, 동료를 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서학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버리지는 못했다.
신념을 버리는 대신 죽음을 택했던 이벽이 옳았거나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쪽저쪽 기웃거리며 오래 살았던 정약용 역시 옳거나 틀리지 않았다. 두려워 벌벌 떨며 쉽게 굴복하고서는 다시 천주학에 빠져들었던 이승훈(1756∼1801) 역시 옳거나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정약용, 이벽, 이승훈은 체제에서 선택받은 사대부인 동시에 체제를 부정한 '이념 운동가'들이었다.
소설 '매혹'은 조선 후기 정조시대를 배경으로 천주학을 받아들였던 정약용과 이벽이 번갈아 가며 자기 삶을 회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천주학은 정조시대 정치 상황과 맞물려 적을 부르고, 배신을 부르고, 피를 부르고, 굴복을 부르고, 면종복배를 부르고, 죽음을 불렀다.
신념은 무엇인가? 신념을 위해 힘써 차린 밥상을 걷어 차버려도 좋은가? 한 끼 따뜻한 밥을 얻기 위해 신념을 모자 벗듯 벗어 던져도 좋은가? 나는 나 좋아서 신념을 좇아간다고 치자, 남아서 핍박 받아야 하는 가족은 어쩔 것인가. 그렇다고 내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만백성의 고통을 외면해야 하는가. 제 가정도 돌보지 못하는 자가 만백성의 아픔을 껴안을 수 있는가. 아니, 껴안아도 되는가.
남편이 '행장'을 꾸릴 때 아내는 '아궁이' 앞에 앉아 한숨을 쉬는 법이다. 당신이라면 어느 쪽을 위로할 것인가. 지은이는 서학과 사대부들을 통해 이 답할 길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은이 최보식은 1960년 생으로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일간지 기자 출신 특유의 굳건한 문장으로 힘이 있으나 다소 단조로운 느낌도 준다. 지은 책으로 '김유신 무덤에서 뛰쳐나오다' '얼굴' '우리시대 사람산책' 등이 있다. 356쪽, 1만2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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