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 빛을 그리다/박복조 지음/시와반시 펴냄

"꽃이 아닌, 사람을 노래하고 싶었다"

'노인은 약국 박카스 손님이었다/남루였지만 정장 차림에 눈이 맑고 깊었다/ 서울 사는 아들이 삼성 이사라고, 이틀에 한번은 약국에 와 아주 목마른 듯 마셨다/ 그때마다 아들 이야기는 후렴/ (중략) 땟국이 흐르고 냄새나는 정장은 어디서 잤을까. (중략) 준비한 털옷을 주니 순순히 받았다/ 절을 여러 번 하며 떠났다/ 그 뒤로 노인은 1호선 전철역 검은 출구 앞에도/ 약국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갈증 중에서

중견 시인 박복조 씨가 세 번째 시집 '빛을 그리다'를 펴냈다. 남루한 입성의 저 노인은 '아들이 삼성 이사'라고 하면서 '갈증 난 사람처럼 박카스를 마셨다.' 언제나 때 묻은 손으로 박카스를 마셨지만, 박카스 값을 잊지 않고 지불했다.

두 번째 시집 '세상으로 트인 문'에서 야생화를 노래했던 박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진한 사람 이야기를 꺼내놓고 있다. 야생화를 노래했던 두 번째 시집 역시 그 귀착점이 '사람'이었음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야생화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던 탓에 '야생화 시인'으로 불리곤 했다. 박 시인은 이렇게 말해다.

"나는 꽃이 아니라 사람을 노래하고 싶었어요."

박복조 시인은 오랜 세월 약사로 살았다. 약국이라는 공간에서 그녀는 보통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을 '사람 풍경'을 보았다. 1960년대 초에는 약 도둑이 극성이었다. 몸이 아프지만 입원할 돈도, 약을 살 돈도 없었던 사람들은 결핵약, 영양제 등을 훔쳐갔다. 조제실에 들어가 주문받은 약을 조제하고 나오면 약과 사람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 삶 역시 우리가 살아온 '한 세월'이었다. 그렇게 약국에서 '한 세월'을 보냈으니, 약국에서 본 '사람 풍경'을 써야 할 것이다.

"젊었던 시절엔 문학이 생활과 힘겨루기를 하며 물러서기도 하고, 다가서기도 했는데, 이제는 시가 내 모든 땅을 차지했다. 죽는 날까지 채찍질해서 시리도록 좋은 시를 쓰고 싶다. 그것이 전부다."

이번 3집과 더불어 다음에 펴낼 4집 역시 '약국에서 본 사람 풍경'을 주제로, 사람살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물이 그리운 새는 길게 울듯, 그런 울대로 노래처럼 울고 싶다. 첫 꽃이 필 때, 첫 생명이 태어날 때, 첫 마음으로 연필을 깎아 쓸 것이다." 133쪽, 7천원.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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