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이 평생 가까이했던 문방사우(文房四友) 가운데 붓은 네 가지 덕을 갖춰야 최상의 품질을 자랑할 수 있다고 한다. 끝이 뾰족해야 하는 첨(尖), 가지런해야 하는 제(濟), 털의 모둠이 원형을 이뤄야 하는 원(圓), 한 획을 긋고 난 뒤에도 다시 일어나는 힘을 일컫는 건(建)이 그것이다.
2004년 공예 분야 무형문화재 제15호 모필장(毛筆匠·붓 제작 명인)이 된 필원(筆園) 이인훈(李仁勳·65) 선생은 올해로 꼬박 50년 동안 붓만을 제작해 오고 있다. 16세 때 조부와 선친에게 붓 제작기술을 배운 지 44년 만에 명인에 오른 그가 만든 모든 붓엔 '무형문화재 15호 필원 이인훈'이 낙관처럼 새겨져 있다.
"청송 진보서 한학을 가르치시던 조부께서 3·1운동 주모자로 몰려 서울로 피신했다가 마침 그 집에 있던 붓 장인에게서 제작기술을 배워 낙향한 후 서당을 접고 생계를 위해 붓을 만들기 시작했던 게 부친에 이어 저까지 전수됐습니다."
이 모필장의 아들 석현 씨도 7년째 아버지의 기술을 전수받고 있어 4대에 걸쳐 붓과 인연을 맺고 있다. 이 씨의 붓은 전국의 유명 화가, 서예가들이 가장 선호한다. 주문의 70% 정도는 경기도와 서울의 고객들이 쓴다. 그가 만드는 붓은 족제비털을 이용한 '황모붓', 양모를 이용한 '양모붓', 청설모 꼬리를 이용한 '청모붓', 아기 배냇머리를 사용한 '모태붓'에서부터 노루와 한우 털을 이용한 붓 등 100여 가지에 이른다. 이 씨는 붓을 만들 때 꼭 지키는 두 가지 철칙이 있다. 최상의 재료와 전통방식을 고스란히 따른다는 것. 그는 대구 달서구 본동 자신의 아파트에서 한 자루를 만드는 데 150여 번의 손길이 가야 하는 붓을 1년에 약 3천 자루 정도 만들고 있다. 보통 서예용으로 쓰이는 20호짜리 붓 30개를 제작하는 데는 4, 5일이 소요된다.
"붓끝의 힘과 탄력성을 위해 붓털을 삼겹에 걸쳐 제작하는 한국 전통 붓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통틀어 제가 유일할 겁니다."
그동안 인기리에 방영됐던 TV드라마 '태왕사신기' '바람의 화원'과 영화 '미인도' 등에 등장한 붓의 80%가 이 씨가 만든 것들이다. 그의 붓은 전직 대통령들을 비롯해 일본 총리, 중국 장이머우(張藝謀) 감독 등에게서도 호평을 받았다.
"호랑이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찾아와 호랑이 털의 섬세함을 그릴 수 있는 붓을 주문한 적이 있습니다. 한 달에 걸쳐 붓을 제작해 시험해 봤더니 한 획을 그어 150가닥의 털을 묘사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사용자가 쓰기에 가장 편안한 붓을 제작하는 게 모필장 이 씨의 가장 두드러진 솜씨다. 지금까지 그가 만든 붓 중 최대 크기는 길이 1.8m, 무게 55㎏이 나가는 것으로 경기도 세계엑스포전시장에 걸려 있다. 최소 크기는 족제비 털 15가닥으로 만든 붓으로 단청 제작자가 특별히 주문한 것이다.
"끝이 없는 것 같네요. 붓은 만들수록 더 어려워져요. 어떤 붓도 50% 이상 제 마음에 든 붓은 없었으니까요."
현재 시판 중인 20호짜리 붓의 대부분은 중국산. 중국산은 붓끝 털 부분이 뭉툭하고 글씨를 쓰면 붓끝이 잘 갈라진다. 그러나 이 씨의 붓은 아무리 눌러 써도 붓끝이 갈라지지 않는다. 비결은 세 가지 털을 배합해 만들기 때문.
50년 붓과 함께 해온 모필장 이 씨에게도 못 이룬 꿈이 있다. 바로 자신만의 상설공방을 갖는 것. 제자가 되겠다는 문의가 많지만 공방이 없어 못 받아 주는 처지이다.
"상설공방이 생긴다면 내외국인들에게 우리네 전통 공예품을 항상 보여줄 수 있지 않겠어요."
그는 소중히 간직한 듯한 붓 한 자루를 꺼냈다. 옛 선비들이 늘 소매춤에 갖고 다니던 삼동필(三同筆)이었다. 하나의 붓 자루에 크기가 다른 세 자루의 붓이 한꺼번에 들어 있는 붓으로 우리나라에선 다섯 자루밖에 없는 귀한 전통붓이다.
현재 대구엔 공예 분야 5명, 가양주 분야 1명 등 6명의 무형문화재 명인들이 있다. 이들이 한 곳에 모여 자기 분야 공예품을 제작, 상설전시할 공간이 있다면 전통의 멋이 좀 더 우리 생활 속으로 녹아들지 않을까. 모필장 이 씨의 희망이 하루빨리 실현될 수 있길 바란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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