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5주년이다. 한국은 근대제국주의 식민지를 겪은 나라 중에서 가장 빠르게, 가장 성공적으로 일어선 나라다. 그러니 우리는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있다. 그러나 선배 세대들이 겪어야 했던 신산(辛酸)을 기억해야 하고, 오늘의 한국을 건설한 그들에게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
김종기(84·경상북도 청도읍 부야1리 쇠실마을) 씨는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에 맨몸으로 마주섰으며 허기진 배를 안고 오늘의 한국을 건설한 선배 세대다. 그는 쇠실마을에서 태어나 자랐고 6남매를 키워냈으며 지금도 거기 살고 있다.
◆가는 곳 모르고 끌려가
김종기 씨는 1943년 17세 때 겨울, 읍사무소로부터 '나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영문도 모르고 나갔는데 대기 중이던 트럭에 짐처럼 실려 고향을 떠났다. 어디로 가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몰랐다. 도착한 곳은 경북 봉화의 철도터널 공사장이었다. 근로보국현장이었다.
집에서 기다리는 아버지와 누이가 보고싶었고 걱정도 됐다. 야음을 타 도망쳐 걸어서 경북 의성까지 왔는데 한국인 순사의 불심 검문에 걸리고 말았다. 한국인이라는 점에 의지하고 통사정했지만 그는 봐주지 않았다. 20일 동안 구류를 산 뒤 풀려나 걸어서 청도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와 못 건설 작업을 하던 중 다시 읍사무소의 출두 요구를 받았다. '못 건설도 보국작업이다. 잡혀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믿고 읍사무소로 갔는데 하룻밤을 거기서 자고, 이튿날 바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번에는 징용이었다. 아버지와 누이에게는 '떠난다'는 인사조차 못했다. 근로보국대에서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온 지 한 달 만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일본 규슈의 아카히키 탄광이었다. 1944년 초부터 해방될 때까지 거기서 탄을 캤다. 일본말만 사용할 것을 강요받았는데 일본말을 하지 않으면 밥조차 굶어야 했다.
1945년 8월 항복한 일본은 징용자들을 내팽개쳤다. '알아서 돌아가라'고 했다. 돌아가고 싶었지만 여비가 없었다. 게다가 몸까지 아팠다. 그는 공사현장 인부로 일하며 끼니를 이었다. 공사장에서 함바집을 운영하던 한국인 주인이 귀국하면서 '짐을 들어주면 뱃삯을 대주겠다'고 해서 짐꾼으로 귀향길에 올랐다. 함바집 주인의 고향인 경남 김해까지 짐을 날라주고 고향 청도로 돌아왔다. 1945년 12월이었다.
◆한국전쟁 '전사자' 분류되기도
고향으로 온 김종기 씨는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다. 3살 아래인 아내와 얼굴도 모른 채 결혼했지만 아들과 딸 6남매를 낳았다. 하루 세 끼를 죽으로 연명했지만 평화로운 날이 이어졌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고 그해 7월, 스물넷의 나이로 징집됐다. 자기 뜻과 무관하게 세 번째로 집을 떠난 것이다. 누이들은 이미 시집을 갔고 집에는 임신해 배가 부른 아내와 늙은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UN군 소속으로 미 3사단 7연대에서 복무했다. 미군 3명에 한국인 7명이 한 조였다. 부산 제 4부두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서 훈련을 받았고, 원산에 투입됐다.
눈앞에서 동료 전우들이 죽어갔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함경도 어디쯤 주둔하던 시절, 식당 사역에 차출됐는데 그때 그의 분대원들은 작전을 나갔고, 모두 죽었다. 김종기 씨는 한동안 '죽은 사람'이 되어 식당에서 근무했다. 식당에서는 파견대원으로 알았고 본대에서는 전사 처리됐던 것이다. 4개월 뒤에 신원 조회로 다시 '산 사람'이 되었다. 강원도 철원 주둔 시절, 휴가를 받아 고향엘 다녀오는 사이 중대원 3분의 1이 죽어나갔다. 그런 세월이었다.
◆ "그저 시키는 대로 하던 세월"
휴전 뒤 미군 소속이던 그는 한국군으로 편입됐다. 보병 제33사단 102연대였다. 제대할 때가 됐는데 집에 가라고 허락해주지 않으니 갈 수 없었다. 그 시절엔 그랬다. 명령대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 주장은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7년 5개월을 군에서 복무했다. 어째서 그렇게 오래 근무해야 했는지, 독자라고 아버지가 의가사제대를 신청했는데도 왜 무시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남편이 군대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동안 홀로 자식들을 키우고 논밭을 일구었을 아내의 고난은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 제대 뒤에는 산을 일구어 6남매를 키우고 가르쳤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분명해요. 안 통한다 싶으면 시위도 하지요. 하지만 그만큼 책임감을 가져야 해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어려움을 견디려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이지요."
가라면 가야하는 세월, 어디로, 왜 끌려가는지도 모르는 세월과 다시 맞닥뜨리지 않으려면 부지런하고 책임감 있게 살자는 말이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사진·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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