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요코야마의 한일 이야기] 삶과 죽음의 미학

얼마 전 한국 유명 배우의 자살 뉴스가 일본 열도를 흔들었다. 한류 열풍의 계기가 된 드라마 '겨울 연가'에 출연했던 박용하의 이야기이다. 가수로도 활약한 그는 일본 골드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그의 죽음은 일본 팬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신격화되어 있던 그가 겪고 있었던 사생활의 고통이 비로소 현실이 되어 다가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의 죽음은 한 인간으로 살기를 바랐던 가슴 아픈 절규였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연예인의 자살이 잇따르고 있다. 최근 5년간 자살한 한국 연예인은 박용하가 15번째라고 한다. 한국에서 연예인은 공인으로 취급되고 항상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공인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을 하면 곧바로 인터넷 등에서 강하게 비난을 받는다. "형편없다" "그만둬" 등의 댓글이 달리기 일쑤고, 옛날의 졸업 앨범을 찾아내서 성형 전과 후의 모습을 비교한다. 아무리 인기 있는 연예인이라도 한 번 실수하면 당장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런 압력에 망가진 그들이 사인(私人)으로 돌아가기 위해 선택하는 하나의 방법이 자살일까. 그러나 언론 보도를 보면 그들은 죽음으로도 사인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죽음은 드라마처럼 미화되고 마지막까지 흥미의 대상이 된다.

옛 일본 무사 사회에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미학이 있었다. 주군이 죽은 후 처자와 가신들이 그를 따라 할복(割腹)하는 순사(殉死)가 미덕이었다. 에도(江戶) 시대의 '하가구래'(葉隱)에는 "무사도라고 하는 것은 죽을 명분을 찾는 것이다"고 적혀 있다. 이 문구는 무사도 정신의 귀감으로서 태평양 전쟁 때의 특공대와 옥쇄, 자결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 문구는 오랫동안 타인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칭송하는 무사도의 가르침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원래의 뜻을 잘못 해석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본인은 이러한 해석의 오류로 역사상 많은 잘못을 범해왔다는 것이 된다.

2001년 도쿄 신오쿠보 역 선로에 떨어진 신사를 구하려던 남자 2명이 전차에 치여 사망했다. 그 중 한 명은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 씨였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의 홈페이지에 10만 개 이상의 애도의 글을 올렸다. 2006년, 우연하게도 같은 역에서 일본 여성을 또다시 한국 유학생이 구했다. 그는 "순간, 이수현 씨가 떠올랐고, 나도 구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시 그곳에는 많은 일본인이 있었지만 허둥대고 있을 뿐이었다. 일본인에게는 누구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동을 할 용기도 없어졌다고 생각된다. 무사도 정신을 이웃 나라 한국의 젊은이에게서 배우게 된 것이다.

인간처럼 자살을 하는 동물은 없다고 한다. 동물도 자살을 한다는 설도 있지만, 그것은 거미가 자손의 번성을 위해 자기 몸을 새끼에게 먹게 하거나, 개체 수가 너무 많아진 생쥐가 집단 이주하면서 강에 빠져 죽는 것을 자살로 보는 경우뿐이다. 동물은 삶과 죽음을 자연의 섭리에 맡기고 있으나, 인간에게는 지능 발달과 함께 자살이라는 선택지가 주어졌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인생의 터널 속을 계속 걸어갈지, 아니면 중도하차할지를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희망과 동시에 절망도 아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신(神)이 쳐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살은 어떤 이유일 때 정당화되는가. 우리는 앞으로도 이 물음을 계속할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을 아름답게 하거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비록 힘들고 실패만 반복하고 있다고 해도, 거기에서 배우는 것은 매우 크다. 우리의 삶은 미래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항상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자살의 메카, 도쿄의 중심부를 달리는 중앙선 선로에 오늘 아침에도 누군가가 뛰어들어 지하철이 멈추었을지 모른다. 자신의 마지막 절규를 들어주기를 바라면서 아쉬운 목숨이 또 하나 사라져간 것일까.

요코야마 유카 일본 도호쿠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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