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없이 살 수 있다 VS 없다.'
휴대폰이 대다수 국민의 손에 쥐어진 건 불과 15년 남짓. 하지만 이 문명의 이기(利器)처럼 일상생활 패턴까지 바꿔놓은 발명품이 있을까? 아예 전자파를 달고 산다고 할 정도로 휴대폰을 들고 다닌다. 젊은 세대는 일정 시간 동안 전화나 문자메시지가 오지 않으면 불안 증세까지 보일 정도. 이들에겐 커뮤니케이션 도구를 넘어 분신이나 아바타로 대접받는다.
하지만 노폰족(No Phone族)의 생각은 180도 달랐다. '정말 필요에 의한 휴대폰 통화가 하루에 몇 통이나 될까?' '불편함은 잠시지만 휴대폰이 없기 때문에 누리는 자유는 오래 간다' '중요한 일을 할 때, 누군가를 만날 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 등. 휴대폰 없이는 잠시도 불안해서 견디기 힘들다고 하는 노폰족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노폰족의 결론은 '없으면 없는 대로, 아무 문제 없다'.
올해 상반기 기준으로 휴대폰 보급률이 100%(1인당 휴대폰 1대 이상)가 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것도 인구 250만 명의 내륙도시 대구에서 노폰족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봤다.
◆노폰족의 대명사, 이성환 교수
계명대 교수 중에 휴대폰이 없는 이는 일본학과 이성환(53) 교수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도 10년 넘게 노폰족으로 꿋꿋하게 잘 버티고 있다. 그렇다고 소통을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메일이나 연구실, 집전화로 필요한 연락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하고 있었다.
이 교수는 노폰족의 장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항상 공중전화 카드를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필요할 때 잠시 공중전화 박스를 찾아 통화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연구나 다른 취미 생활에 몰두합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연락 역시 특별히 급하지 않으면 이메일로 주고 받는 것이 더 편리합니다."
이제는 아예 휴대폰 없이 사는 법을 터득했다. 술을 마시고 대리운전을 부를 때는 공중전화로 하면 어디인지도 모르고 신분이 불확실한 사람이라 생각해 아예 오지 않기 때문에 그 술집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해 부른다. 서울 출장을 갔다 술을 한 잔 했을 때는 자신의 차를 세워둔 동대구역 주차장 직원에게 시원한 음료수를 사주며 대리운전을 부탁한다.
황당한 일도 있었다. 3년 전 일본 출장을 갔다 돌아와 부산역에서 공중전화 박스를 찾아 그동안 못했던 통화를 30군데 정도 하고 있는데 경찰관 2명이 수상하게 여겨 경찰서까지 가서 조사를 받은 것. 요즘 같은 휴대폰 전성시대에 공중전화에서 30통 이상 전화를 거는 사람이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아내에게도 미안한 일이 더러 발생한다. 같이 있을 때 집전화를 아내가 도맡아 받다 보니 항상 바꿔주는 불편함이 뒤따른다. 등산이나 출장 등으로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 안부가 궁금해도 아내는 남편의 연락이 올 때까지 참아야 한다. 이 교수는 배포도 좋다. 멀리 갈 때는 "여보! 큰 사고 나면 뉴스에 먼저 나오니 안심해"라고 말한다.
◆동인1·2가동 경로당에서 만난 '평생 노폰족'
대한민국 전체가 휴대폰족이 맞긴 맞나 보다. 이달 10일 '노인들 중에는 휴대폰을 불필요하게 여기는 분이 많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찾은 대구 중구 동인 1·2가동 경로당에서 휴대폰이 없는 노인은 단 1명에 불과했다. 20여 년 전 교장으로 정년퇴직을 하고 이곳에서 붓글씨를 취미 생활로 하고 있는 김완식(83) 씨. 유일한 노폰족이었다. 그것도 평생 단 한 번도 휴대폰을 가져본 일이 없는 순수 100% 노폰족.
김 씨는 "1년 365일 중 휴대폰이 없어서 불편하거나 아쉬울 때는 하루 이틀 밖에 없다"며 "멀리 여행을 갈 때는 가족들이 걱정을 하지만 요즘은 다들 휴대폰이 있어 잠시 빌려서 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휴대폰에 수많은 기능들이 있는데 그걸 어떻게 익혀서 쓰느냐"며 "차라리 없는 게 속시원하고 좋다"고 덧붙였다.
이 경로당 이종정(86) 회장도 휴대폰은 가지고 있지만 필요성에 대한 생각은 노폰족 김 씨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회장은 "하루 종일 있어도 전화받을 일이 거의 없다"며 "자식들이 연락올 때를 위해 갖고 있는 것이지 통화 이외에 다른 휴대폰 기능은 하나도 모른다"고 했다.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김경숙(63·여) 씨는 "카메라 기능과 문자메시지 정도는 쓸 줄 알지만 휴대폰이 없어도 생활하는데 큰 불편은 없을 것 같다"고 노폰족에 동조하는 말을 했다.
◆노폰족이 가능한 직업들
법조계에서는 판사 직군 가운데 노폰족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판사는 실제 전화기가 없어서 명함에 휴대폰 번호가 없는 경우가 많으며, 변호사는 있어도 가르쳐주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검사는 2개를 갖고 있다가 사람 봐가면서 번호를 알려준다는 얘기도 대체로 맞다. 대구지방법원의 한 판사는 "휴대폰이 있으면 엄무에 방해가 될뿐더러 공정한 판결에도 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며 "지인들에게는 집 전화 번호를 알려주고 아내를 통해 다른 사람과 약속을 하는데 그게 훨씬 마음이 편하다"고 털어놨다.
의사들 역시 휴대폰 번호를 잘 알려주지 않는다. 실제 병원과 의과대 수업, 본인의 집 밖에 모르느 열혈 의사들은 휴대폰이 있어도 집에 며칠씩 놔두기도 하고, 아예 다른 이에게 맡겨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요즘은 종교인들도 대부분 휴대폰을 갖고 있는데 불교, 그 중에도 사찰 업무를 담당하는 사판승(事判僧)들은 폰족이 많으며, 구도의 길을 걷는 이판승(理判僧)들은 노폰족이 많다.
한편 요즘 폰족이 되는 시기는 갈수록 빨라져 초등학교 입학까지 앞당겨졌다. 7세 이하는 주로 노폰족이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8세가 되면 휴대폰을 사 주는 부모가 많아진 것이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우태욱기자 wo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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