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누구나 어릴 적 키가 큰 전봇대에 기대 서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술래잡기를 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술래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숨는 시간을 기다려 줬다. 그 무궁화는 학교 가던 길가에 옹기종기 모여 피고 지고 또 피어 우릴 배웅해 주었고 선생님 손풍금 소리에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노래도 불렀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훌쩍 어른이 되어 버린 나 또한 무궁화를 잠시 잊고 산 것 같다. 며칠 전 초등학교 담벼락에 무궁화 두 그루가 꽃망울을 피운 채 서 있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실로 오랜만에 무궁화를 보니 유년(幼年)의 그 많던 무궁화들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꽃, 무궁화에 대한 기록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고대 지리서 '산해경'(山海經)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동방에 군자국이 있어 무궁화가 많다" "신라를 근화향(槿花鄕)으로 부른다"라는 구절이 나오고 애국가에도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 했으니 옛적부터 우리 땅을 널리 수놓던 꽃인 것만은 명백한 사실인 것 같다.
여름이다 싶으면 하나 둘 피기 시작하여 늦여름에 한창이며 가을까지 이어지니 무궁(無窮)하다는 그 이름이 과히 부끄럽지 않다. 그렇다면 꽃을 피우면 얼마나 오래 가는가. 놀랍게도 수명은 단 하루라고 한다. 아침에 꽃을 피워 저녁에는 꽃잎을 말아 닫고는 져버리고 이튿날 동이 트면 다른 꽃송이가 피어나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이름 그대로 끝없이 피고 지고 또 피는 것이다.
하지만 나라의 대표 꽃인 무궁화에 대한 그간의 평가는 여름에서 가을까지 지겨울 정도로 계속 피어난다든가, 진딧물이 새까맣게 모여서 화장실 옆에 심어야 한다든가 만지면 피부병이 생긴다는 둥 이상하리만큼 부정적이고 냉소적이다.
이름 없는 들꽃도 아닌 나라꽃이 어떤 이유에서 이토록 폄하되었을까. 속설에는 일제 강점기에 선구적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이 '민족얼'을 고취하기 위해 불굴의 무궁화 정신을 강조하자 일제가 무궁화를 우리의 국화(國花)로 여기고 배척의 대상으로 삼아 악의적으로 퍼뜨린 소문이라고 한다.
1997년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꽃은 장미인 것으로 나타났다. 41.4%가 장미를 선호했으며 다음으로 국화(菊花), 백합의 순이었다. 이는 나라의 상징인 나라꽃이 주변에서 사라짐은 물론 국민들의 마음속에서도 사라진 결과가 아닐까.
영국의 국화인 장미가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릇이나 접시 같은 실생활 용품의 문양은 물론이고 연인 간 사랑 고백에도 장미는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담당한다. 또 일본인들이 심정적으로 가장 아낀다는 벚꽃은 천년고도 경주, 서울 여의도 윤중로(輪中路) 등 전국 각지의 가로수로 흔하게 보이고 축제까지 펼쳐지지만 무궁화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일본 사람들은 결혼식장에서 으레 벚꽃차를 대접한다. 더욱이 '벚꽃놀이'(花見)란 말이 따로 있을 정도이고 봄날 일기예보 시간엔 '벚꽃이 어디쯤 피었는지' 알려주는 예보도 하며 '밤 벚꽃놀이'에 온 국민이 열광할 만큼 벚꽃은 일본인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장미나 벚꽃에 비하자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무궁화에 대한 예우나 인식은 거의 방치에 가깝다는 생각은 지나친 기우(杞憂)일까. 유구한 역사 동안 삼천리 강산을 물결치던 겨레의 꽃 무궁화는 무관심 속에 어디론가 깊숙이 숨어 버리고 어느새 우린 술래가 되어 버린 걸까. 최근 지자체에서 무궁화를 소재로 한 축제와 그리기 행사도 이어지고 있다고 들린다. 이처럼 서서히 마음의 정원에 무궁화 한 그루씩 자라나 집 뜰과 거리로 옮겨 심어 보면 어떨까.
금년은 광복 65주년이자 국권 침탈 100년을 맞는 해다. 무궁화는 숱한 고난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선 우리 민족처럼 지지 않는 불굴의 혼(魂)이 깃든 꽃이다. 다시금 무궁화를 아끼고 가꾸는 운동을 통해 나라 사랑의 시발점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채재(FTV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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