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산 자락에 참꽃(진달래)이 흐드러졌다. 남산도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꾀꼬리가 우는 산모퉁이엔 아카시아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배꽃도, 찔레꽃도 하얗게 웃는다. 고라니 한 마리가 소나무와 숲을 희롱하며 노닌다. 천마산과 남산이 마을을 감싸고 강을 내려다본다.
꽃개(花浦)에 아낙네들이 모여든다. 분을 바르고 옷매무새를 한껏 뽐냈다. 아이들도 종종걸음이다. 강모래를 밟으며 뒹군다. 떡과 묵을 곁에 두고 '꽃달임'(화전놀이)이 펼쳐진다. 수줍은 춤사위와 노래가 물살을 타고 흐른다. 강가는 이제 여인들의 해방구다. 흥이 돋은 부녀자들은 나룻배의 남정네들을 의식하지 않는다. 남정네들은 꽃개와 하풍나루를 오가며 꽃달임을 흘낏거린다. 뱃놀이(선유)보다 꽃달임에 더 눈길이 간다. 금포마을의 봄날은 그렇게 따스했다. 30년 전까지 금포, 백포의 강가에서 엿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산과 강, 나루가 어우러져
문경시 영순면 이목1리 금포(黔浦)마을. 진주(진양) 강씨 집성촌이다. 마을 뒤쪽으로 천마산(279m)이, 서쪽으로 남산이 포근히 감싸고 있다. 문경시 남동쪽의 영순면은 동으로 예천군 용궁면, 서로 상주시 함창읍, 남으로 예천군 풍양면, 북으로 문경시 산양면과 맞닿아 있다. 천마산이 북풍을 막고, 남산은 태풍을 막고, 낙동강이 농사와 뱃놀이의 물길을 터주는 곳이다.
강치본(71) 씨는 "옛날 천마산 끝자락과 남산 자락 양쪽에 줄을 매달아 마을 입구를 막은 뒤 동제를 지냈다"고 말했다.
금포는 천마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예천 풍양면 하풍리를 마주하고 있다. 금포와 옆 마을 백포는 1970년대까지 꽃개나루(화포)를 이용해 뱃놀이와 화전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이 나루터는 꽃이 만발한 갯벌이라고 '꽃개펄'로 불린다. 화전놀이에 쓰였던 천마산과 남산 진달래꽃이 이 나루터에 소복이 쌓였던 것. 꽃개나루 건너에는 용담산과 개구리산이 낮게 엎드려 있는데,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형상이라고 한다. 바로 용담산과 개구리산 사이가 하풍나루터다.
꽃개나루와 강 건너 하풍나루는 다리가 없던 시절 예천과 문경을 잇는 주요 교통로이자, 교류의 원천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1900년대 초만 해도 부산에서 소금이나 새우젓 등을 실은 배가 이곳에서 나는 작물과 교환하기 위해 수없이 오갔다"며 "방물장수들도 떼 지어 몰려 남도의 문물이 가장 빨리 전해지던 곳을 '금백포'(금포+백포)라고 했다"고 전했다.
금백포는 조선시대 영남인들이 한양으로 가는 길목, 영남대로를 연결하는 주요 세 물길 중 하나였다. 다른 두 곳은 예천 풍양면 낙상리 '새멸마을'과 상주 사벌면 퇴강리 '물미마을'을 잇는 물길, 예천 풍양면 삼강리와 문경 영순면 달지리를 잇는 물길 등이다.
◆길을 내고, 물을 끌어올리고
문경 영순면 오룡리와 금림리를 지나 천마산 동쪽 대현산 큰고개를 넘어서면 왼쪽이 백포, 오른쪽이 금포마을이다. 의성이나 예천 풍양 사람들이 낙동강 건너 금포를 거쳐 예천 용궁장을 보러가기 위해 넘었던 길도 대현산 큰고개였다.
금포와 백포 두 마을이 다른 지역과 쉽게 교통하고, 강물로 농사를 짓게 된 것은 금포 출신 두 형제의 힘이 컸다. 죽을 때까지 고향을 잊지 않았던 강수원'수근 형제다. 젊은 시절 호구지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형제는 늘 고향을 그리워했다. 일본에서 많은 돈을 번 형제는 70년대 초 재일동포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금포마을을 찾게 됐다. 고향 오지마을의 척박한 삶을 풍요롭게 할 방법을 고민했다. 해답은 '교통로 확보'와 '농사지을 땅'이었다.
당시 금백포 사람들이 문경시내로 드나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쪽 대현산 큰고개를 걸어서 넘어야 했다. 형제는 엄청난 돈을 들여 비좁고 험한 고갯길을 넓히고 닦기 시작했다. 이 일이 지역 군수에게까지 알려지면서 군의 지원도 보태졌다. 비좁고 울퉁불퉁한 큰고개는 마침내 우마와 차가 다닐 수 있는 길로 바뀌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금백포에는 농사지을 땅이 없었다. 형제는 또 나섰다. 낙동강변에 큰 돈을 들여 양수장을 설치하고, 농수로를 만들었다. 낙동강변 갯벌은 옥토로 바뀌었고, 금백포 사람들은 70년대부터 논농사로 먹고살 길을 마련하게 됐다. 두 형제의 힘으로 마을 사람들의 삶과 생활이 질적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대현산 큰고개를 넘으면 가장 먼저 '송덕비' 하나가 눈길을 끈다. 고을 군수나 관리를 칭송하는 비가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두 형제의 은덕을 기리며 직접 세운 '강수원'수근백중송덕비'다.
◆백석정과 삼강주막, 그리고 물탕
금포마을을 중심으로 백석정, 삼강주막, 물탕 등은 강과 약수탕 등을 배경으로 한 볼거리다.
금백포 사람들이 낙동강 물굽이와 백사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한 백석정(白石亭). 북쪽으로 금천, 내성천, 낙동강이 합쳐지는 삼강을 조망하고, 바로 앞 강 절벽과 백사장을 음미할 수 있다. 조선 중기 문신인 백석 강제(姜霽;1526~1582) 선생이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던 정자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사각형 팔작지붕 건물인데, 백석의 사위인 능성 구선윤 등이 구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5차례에 걸쳐 중수했다. 현 건물은 1999년 중수한 것.
조선시대 마지막 주막으로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삼강주막은 백석정에서 북쪽으로 1㎞ 남짓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영남 북부지역 사람들이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갈 때 문경새재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나루터가 바로 상주 퇴강나루와 함께 삼강나루였다.
금포마을 인근 천마산 끝자락 '물탕(거리)'도 옛날 유명세를 탔던 곳이다. 영순면 금포마을에서 말응리로 가는 길목, 문수사 절벽의 약수터다. 1주일 전 목욕재계를 한 뒤 마셔야 이 약수의 효험을 볼 수 있고, 천년 묵은 큰 지네가 살기 때문에 닭고기를 먹은 사람이 약수를 마시면 바로 죽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말응리는 이 약수탕의 이름을 따 물탕거리로도 불린다.
예천 풍양면 삼강주막에서 삼강교를 건너 백포마을 백석정까지, 다시 금포마을 천마산 등산로를 따라 물탕을 거쳐 말응리 영풍교까지 이어지는 숲길은 바로 낙동강을 품에 안은 절경이다.
◆금포마을의 유래
30가구 70여 명이 강을 젖줄로 산 속에 파묻혀 사는 진주(진양) 강씨 집성촌, 금포마을. 문경시 영순면 이목1리다.
마을 앞 강변 나루터에 검은 바위가 있다고 금포로 이름 지어졌고 흑포, 검포, 금성개 등으로 불린다. 배나무가 많았다고 배나무골, 이목동으로도 불렸다. 금포 옆 백포마을은 강변 나루터에 흰 바위가 있다고 해 이름이 백포인데, 지금도 강물이 빠지면 흰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진주 강씨들이 이 마을에 처음 둥지를 틀기 시작한 것은 조선 숙종(1661~1720) 때다. 마을 이장 강치본(71) 씨의 8대조 설월당 강주식 선생이 삼인동에 살다 천마산 동쪽 대현산 큰고개를 넘어 금포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부터다.
마을 동쪽 천마산 기슭에는 '설월당 강선생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유허비에는 '설월당 진양강공은 산림에 은거하는 고사다. 우뚝 뛰어난 재주를 갖고 태어나 국가에서 학문을 숭상하니 과거로써 그 마음을 엮지 아니하고 시서로써 그 가슴을 승복하게 하고자 하였다. 낙동강변의 금포 물가 한적한 곳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짓기를 금주정사라 하였다'라고 돼 있다. 금주정사(黔洲情舍)는 현재 금포 마을회관 곁에서 마을 시조를 기리고 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 매일신문, (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이원규 ▷사진 이재갑 ▷지도 신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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