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원태의 시와 함께]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 이기인

오랜만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당신을 만났지요

나는 당신의 등뼈를 본 첫 번째 사랑이지요

당신의 등뼈에 붙은 살이 얼마나 얇은지 알고 있는 사랑이지요

그렇게 얇은 삶이 바람에 견딘 것을 알고

손가락으로 당신의 등을 더듬어볼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일과

뒤돌아서서 날 깨우쳐주신 마른 가슴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내가 처음부터 만질 수 없었던 당신의 몸은 바람이 부는 동안

내가 사는 골목까지 날아와 기다렸지요

당신은 그때 젖은 시집 속으로 부끄러워하는 몸으로 들어왔지요

혼자서, 납작하게 살아온 당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줄까요

불빛처럼 아름다운 당신의 이야기를 밤새 읽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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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당신의 등뼈"를 첫 번째로 보는 일이어서 한없이 절실하며,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어서 경이롭고, "당신의 등뼈에 붙은 살이 얼마나 얇은지 알고 있는" 것이어서 슬픔이기도 하다.

모름지기 사랑은, 저절로 대상을 '알게 되는 것'이거니와, 뒤돌아서서 깨우치게 되는 게 훨씬 더 많은 이른바 '남는 장사'인 셈이다. 사랑을 통한 그 앎의 목록들 또한 참 적실한데, "그렇게 얇은 삶이 바람에 견딘 것을 알"게 되고, 또 "손가락으로 당신의 등을 더듬어볼 수 있"어 직접(直接)적이며, "마른 가슴"의 깨우침을 안겨주는 것이어서 더는 여한 없는 것이다.

한 권의 좋은 시집을 읽는 일이란, "혼자서, 납작하게 살아온" 당신의 이야기를 밤새 읽는 일과 같아서,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맞닥뜨리는 이토록 절실하고, 경이롭고, 슬프고도 아름다운 일이다. "불빛처럼 아름다운 당신"을 만나는 일이다. 사랑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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