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우주는 아주 커다란 알과 같았다. 그 격렬한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 아주 작은 덩어리가 생겨났고 그것은 점점 커져서 거대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1만8천 년 동안의 잠에서 깨어나 혼돈의 알을 깨고 천지를 개벽시킨 태초의 거인, 그 거인의 이름은 반고였다… 그의 숨결은 바람과 구름이 되었다. 목소리는 우레가 되고, 왼쪽 눈은 해가 되고 오른쪽 눈은 달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살아가는 세상이 생겨났다. 혼돈 속에서 태어난 거인이 죽고, 거인의 죽은 몸이 다시 이 세상의 만물을 이루게 되었다. 세계 곳곳의 신화를 보아도 대개 이 세상은 처음에 혼돈으로부터 출발한다. 히브리 신화, 바빌로니아 신화, 인도 신화 등. 다만 중국 신화에는 절대적인 창조주가 없다. 혼돈으로부터의 천지 창조는 어떤 절대적 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이야기 동양신화』에서 세계의 탄생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우리는 과연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범람하는 외래 상상력의 홍수 속에서 동양인, 아니 한국인으로서 우리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리의 상상력은 과연 자유로운가? '신화'와 '상상력'을 평생의 키워드이자 화두로 삼아온 신화학자 정재서는 묻는다. 그는 동양의 정신과 상상력의 근원을 캐기 위해 신화의 세계로 들어갔고, 한국 동양학의 정체성 문제에 천착해왔다.
그러면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사라졌던 신들이, 망각의 지층 아래 봉인되었던 거인들이 속속 귀환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제우스, 헤라, 아프로디테 등. 하지만 그들의 반대편 한쪽에서 오랫동안 군림했던 동양의 신들이 여전히 잊힌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오랫동안 동양인들의 사고와 상상력의 원천이었던 신들을 소개한다. 제우스의 권능에 필적할 만한 황제, 헤라처럼 여신들을 지배했던 여와, 아프로디테와는 또 다른 우아한 매력의 소유자 서왕모.
사람마다 상상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 그래서 세상에는 굉장히 다양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동양 신화의 세계에 들어가기 전 우리가 새겨야 할 교훈이다. 서양의 그리스 로마 신화나 안데르센 동화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의 하나일 뿐 전부가 아닌 것이다.
동양인들의 의식을 지배했던 신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천 년도 더 된 무덤에 그려진 벽화 속 소 머리를 한 사람. 손에 벼이삭을 쥐고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다. 서양 크레타 섬의 미노타우로스를 닮은 동양의 미노타우로스. 서양의 미노타우로스가 사람을 잡아먹고 사는 괴물인 반면, 동양의 소머리를 한 이 사람은 염제 신농이라고 불렸는데, 불의 신이자 농업을 발명한 신이었다. 자애로운 이 신은 인류에게 좋은 일을 많이 했다. 하루에 백 번씩이나 이름 모를 풀을 직접 씹어서 맛보고 몸에 유익한 약초와 해로운 독초를 분별하여 인간들에게 알려준 것도 이 신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동양에서는 이토록 훌륭한 신을 흉측한 괴물로 그렸을까? 고대 동양에서는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만 생각하지 않았고,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높아 자연에 가까운 동물을 인간보다도 더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정재서 교수는 말한다. 그런데 염제가 그려져 있는 무덤 속 주인은 고구려 사람이었다. 염제는 중국 신화의 신인데 그 신이 고구려의 무덤에서 출현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고구려 사람의 조상과 지금 중국 사람의 조상이 함께 신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염제는 중국 사람뿐만 아니라 고구려 사람도 함께 숭배했던 신일 수 있다. 아울러 지금의 중국 신화 속에는 중국 사람의 신화는 물론 동양 여러 민족의 신화도 함께 담겨 있다. 중국 신화는 사실 동양 신화라고 불러도 좋은 것이다.
이 책에는 동양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온 다양한 신들이 등장한다. 우리를 더 잘 알고, 새로운 상상과 창조의 원천으로 활용할 수 있는 소재가 가득하다.
(새벗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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