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 소나기

난 원두막으로 피했지만 소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 천둥에 놀라 붓 떨어뜨리기 일쑤

"우르릉 쾅!" 주룩주룩 소낙비가 쏟아지고 천둥소리에 놀란 손이 붓을 떨어뜨려 서지에 먹물 소낙비가 뿌려졌다.

"그 몸에 '서예'는 말라꼬 하노" 동정 어린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며 붓에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할 수 있다' 는 신념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허리에 힘이 없어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해 앉는 건 물론 서지도 못하며 양손이 불편해 붓도 제대로 쥐지 못해 심심찮게 놓치는 지체장애 1급 1호가 나에게 주어진 멍에이다.

포항시장애인종합복지관 서예 게시판에는 각종 서예대전 공모전 관련 홍보지가 게시된다. 장애인 관련단체 홍보지 외 각종 일반서예대전 공모전 홍보지가 눈길을 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공신력 있는 서예협회가 있는가 하면 잘 알지도 못하는 단체도 있다.

장애인관련단체가 아닌 일반서예대전에서 작품으로 인정받고 싶어 비장애인 공모전에 출품하기 위해 수개월을 붓과 씨름하며 열정을 쏟았다. 그 덕에 입상을 하여 설레는 마음에 아픔과 피곤함도 잊어버리고 새벽이 밝은 줄도 몰랐을 때도 있었다. 9월 포항시서예대전, 대한민국장애인미술대전에 출품할 작품 준비로 피곤도 아픔도 잊고 지낸다. 언제쯤 소낙비가 그칠지 모르지만 나의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김태욱(포항시 북구 대흥동)

♥ 하수구 역류로 악취 진동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짐 싸들고 대구로 나와 겨우 집 한 칸 얻어 생활이 시작되었다. 애면글면하는 세월 이겨내고 누나들 시집 가고 막내인 내가 턱없이 모자라지만 아버지의 자리 대신하며 엄마와 지내게 되었다. 그 해 여름은 비가 참 모질게도 내렸다. 뾰족한 연필 자루가 하늘에서 내리꽂히듯 소나기는 그렇게 퍼부어댔다. 마당 끝의 하수구가 역류하면서 악취가 올라오고 멀쩡했던 지붕이 뻥 뚫렸던지 방 한가운데로 빗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엄마가 양동이를 갖다 놓자마자 나일론 빗자루를 들고 마당으로 뛰어나가 하수구 구멍에 막힌 나뭇잎, 각종 쓰레기를 쓸어내어 보지만 역부족이었다.

대구의 집이래야 어릴 적 살았던 시골집의 장독대보다도 훨씬 작지만 여러 식솔을 데리고 남의 집을 전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엄마는 집을 애지중지하며 작지만 화단도 만들어 꽃을 피웠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쉴 새 없이 퍼붓는 소나기에 화단의 흙이 넘쳐 하수구를 막은 것이다. 엄마는 세수 대야로 교체를 하고 양동이의 물을 비우려고 들다가 그만 허리를 삐끗하고 말았다. 체념 상태에 이른 엄마는 마당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염없이 비를 맞고 서있었다. 엄마는 펑펑 소리 내어 울고 계셨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럴 때 아버지가 곁에 계셨으면….

빗물에 집이 떠내려가더라도 저렇게 처량하게 비를 맞고 서 있지는 않을 텐데 하는 생각에 나의 목구멍에서 뜨거움이 확 올라왔다. 방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화단을 다 쓸어간 후에야 비는 그쳤지만 엄마의 그 후유증은 말없이 오래갔다. 고1 학생이었던 내가 그때 처음으로 가슴 저리게 느낀 게 있다면 '부부는 늘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나기 무지막지하게 내리는 날이면 그때 일을 상기하고 계실 엄마가 생각난다. 이제는 베란다 창문을 꼭꼭 여미며 하늘 올려다보며 이럴 것이다. '그래, 밤새도록 퍼부어 봐라. 난 이제 끄떡없다.'

문익권(대구 달서구 유천동)

♥ 소는 고스란히 비 맞고

소나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이다. 어릴 적 소설 속 소나기에서 만난 석이와 윤초시 증손녀 딸 연이의 천진난만한 이야기는 수십 년이 흐른 지금에도 머릿속에 진하게 남아 은근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그 소나기가 요즈음 여름 무더위 속에 연일 잦다.

지금처럼 여름이 늘어져 노염(老炎)이 등허리를 적시는 땀처럼 끈적거릴 때 내리는 한줄기 소낙비는 말 그대로 달짝지근하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그 소나기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유년 시절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내 키만큼이나 큰 바지게를 지고 들판으로 나가 소꼴을 베었다. 그 와중에 온종일 말뚝에 묶여 둘레자리의 풀을 몽땅 뜯고 짓이겨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허기진 소를 방천에 푸는 것은 내가 덤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때 소랑 친구가 된 나는 길게 늘어진 소이까리를 한발에 밟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한 움큼씩 소꼴을 베어나갔다. 이어 소꼴 베기에 열중한 내가 어느 순간 방심하여 소이까리를 밟은 발을 무심코 옮길라치면 문득 자유를 느낀 소란 놈이 친구인 나를 배신하여 한순간에 사고를 치고 만다. 부지불식간에 옆 콩밭으로 달려들어 콩밭 전체를 난장판으로 만들며 신나게 뜯어 먹어 버렸다.

처참하게 망가진 콩밭!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의 행동에 눈앞이 캄캄하다가 이제 곧장 들이닥칠 밭주인의 타박은 고사하고 "야~! 이놈아 그깟 소 하나 제대로 건사 못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나!" 하고 떨어질 아버지의 불벼락이 더 두렵다. 억울한 마음에 소란 놈을 끌어다 호통을 치고 고함을 쳐보지만 왕방울만 한 눈만 끔벅이는 녀석은 내 말이 지청구인 양 '내가 뭘 잘못했다고!' 하면서 아예 고개를 돌려버린다.

울화통이 터지고 답답한 마음에 벌이랍시고 녀석을 몰아 인근 나무에 묶고는 다시 소꼴을 벨 요량으로 낫을 찾아들 때 하늘 가득 모여든 시꺼먼 먹장구름이 벼락과 함께 소낙비를 뿌린다. 들판 한 중앙에서 만난 소낙비, 뽀얗게 물보라가 일고 눈앞이 아찔하여 당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다급한 마음에 떡갈나무나 오동잎을 꺾어 머리에 이고선 근처 큰 나무 밑이나 원두막을 찾아 비를 피한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은 양동이로 퍼부을 듯 내리는 소낙비 앞에선 별무신통, 잠시 뒤 물에 빠진 생쥐처럼 초라한 모양새로 낙뢰 소리가 무서워 바들바들 떨며 건너다보는 저쪽에 고스란히 비를 맞는 소가 보인다. 콩밭 사건은 벌써 잊은 지 오래다. 마음이 아리다. 경황 중이라 혼자 내버려둔 소가 소나기 앞에 불쌍하다.

문득 콩 몇 포기를 뜯은 죄로 소를 향해 무식하게 휘두른 내 주먹이 부끄러워 은연중 엉덩이 뒤로 감춘다. "그러게 왜 그걸 먹나!" 하고 중얼거린 나는 이 소나기가 그치면 더 많은 소꼴을 베고 또 어머니께 졸라 허름한 콩이라도 반 됫박 넣어선 넉넉하게 소죽을 쑤리라 마음먹는다.

이원선(대구 수성구 중동)

♥ 멍석 위 고추가 퉁퉁 불어터져

이번 여름에 친구들과 고향을 찾았을 때 소나기가 내렸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꽃잎은 소리 없이 떨어졌다. 수명이 채 다하기도 전에 져버리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아팠다. 소나기가 스치고 간 논두렁에는 푸른 벼와 곡식들이 더욱 선명해 보였고 개구리는 고요한 마을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울어댔다. 고향 마을은 인적이 드문 시골이어서 그런지 수십 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고향 마을을 둘러보면서 문득, 소나기가 내리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는 항상 멍석에 고추를 한가득 널어놓고 "비가 오면 고추 걷어라" 하시며 들판에 나가셨다. 친구들과 놀기에 정신이 팔린 나는 쏟아지는 소나기에 멍석이 퉁퉁 불어터지고 고추에 물이 고여도 그냥 두었다가 들판에서 돌아오시는 어머니 속을 많이도 썩여 드렸었다. 지금 생각하면 철없던 그 시절의 행동이 부끄럽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한다.

추억을 회상하는 동안 다시 소나기가 쏟아졌다. 나는 친구들과 소나기를 배경 삼아 어린 시절 추억 이야기, 살아가는 인생 이야기들을 즐겁게 나누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살다가 보면 좋은 일도 있고 괴로운 일도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내가 힘들지만 힘차게 내리는 소나기처럼 내 가슴에도 뜨거운 희망이 쏟아져 내리는 그날을 기다려 본다.

김귀분(대구시 중구 남산3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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