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짜리 딸을 키우는 박정윤(38·여·대구시 남구 이천동) 씨는 최근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경험했다. 평소 소변을 잘 가리던 딸이 갑자기 어린이집에서 소변을 보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 것. "소변이 마렵다는 아이를 몇 번이나 화장실에 데리고 갔지만 번번이 소변을 보지 못했다"는 선생님의 연락을 받고 급히 어린이집으로 달려간 박 씨는 딸의 배를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소변을 보지 못해 딸의 배가 터질 것 같이 불러 있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가 검사를 받았으나 신체적인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 딸은 병원에 가서야 시원하게 소변을 봤다. 집에 가서도 화장실 다니는 데는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딸은 다음날에도 어린이집에서 소변을 보지 못했다. 이상하다 싶어 소아정신과 전문의에게 상담을 해 보니 스트레스로 인해 소변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 판명됐다. 박 씨는 "스트레스 원인을 찾기 위해 수소문해 보니 몇 달 동안 딸아이가 좋다며 집요할 정도로 따라다니던 남자아이가 갑자기 다른 여자아이를 좋아한다며 딸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일이 있었다. 네 살밖에 되지 않은 딸이 그런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딸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기 위해 좋아하는 물놀이장도 가고 평소보다 더 많이 놀아주었더니 며칠 후 증상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른 못지않게 어린이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그 정도가 심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동산의료원에 따르면 스트레스로 정신과 진료를 받는 어린이 환자 수가 매년 10~20% 정도 늘고 있다. 예전과 달리 일찌감치 보고 배우는 것이 많다 보니 아이들이 스트레스 환경에 빨리 노출된 것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소아 스트레스는 성인 스트레스와 구분되는 여러 가지 특징을 갖고 있어 대처법과 치료법이 다르다. 증가하는 소아 스트레스에 대해 알아봤다.
◆스트레스가 인격 형성을 좌우한다
의학적으로 소아는 만 2~13세를 지칭하지만 전문의들은 미취학 아동들의 스트레스 관리가 특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조금씩 길러지는 초등학생에 비해 만 6세 미만 아동들은 스트레스에 내성이 없어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 6세 미만 어린이들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을 경우 정신적·육체적 성장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사람의 인격은 대부분 만 6세 이전에 형성된다. 인격 형성 단계에 있는 아이들에게 과도한 스트레스가 가해지면 성인이 돼서도 정신질환을 앓거나 성격이 모나는 등 문제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또 스트레스 호르몬이 발육에 지장을 줘 학습·인지 능력 등이 떨어지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전문의들은 "만 6세 미만 자녀를 둔 부모들은 깨지기 쉬운 도자기처럼 아이를 대하고 스트레스 관리를 해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징
성인 스트레스는 본인 문제가 원인인 경우가 많지만 소아 스트레스는 대부분 외부 환경(가정·학교 등)이 원인이다. 조기 발견이 어렵다는 점도 소아 스트레스의 특징 중 하나다. 아이들은 스트레스를 받아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들이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소아 스트레스는 다양한 증상을 통해 발현되는 경우가 많아 더욱 조기 발견을 어렵게 만든다. 증상으로 나타난 경우에는 이미 스트레스가 상당 부분 축적된 상태다. 증상이 나타나더라도 스트레스로 인한 것인지 다른 신체적 이상이 원인인지 파악하는 게 쉽지 않다. 소아 스트레스 환자들이 소아과 등을 거쳐 정신과로 오는 경우가 많은 이유다.
◆증상
스트레스 원인이 다양한 만큼 증상도 각양각색으로 나타난다.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말처럼 어떤 형태로 증상이 나타날지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 가장 흔히 나타나는 증상은 두통·복통 등 신체적 고통을 호소하거나 반항적인 행동(유치원·학교 등교 거부 등)을 하는 것이다. 스트레스가 신체 기능을 조절하는 자율신경계를 교란해 야뇨증, 불면증, 탈모, 우울증 등을 겪는 경우도 많다.
심한 구취를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김모(11) 군은 구취 때문에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하고 친구 만나는 것도 기피했다. 입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데도 김 군은 계속 입 냄새가 난다고 주장했다. 소아과에서 각종 검사를 했지만 특이 소견은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정신과 상담을 통해 부모 이혼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밝혀졌다.
유사 간질 증상을 보인 사례도 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서모 군은 간질 증세로 병원에 입원했지만 정밀검사 결과 간질은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서 군의 증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간질처럼 여겨지지만 간질과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이 있었다. 혼자 있을 때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부모 사이가 나쁠 때 발현했다는 점이다. 좋지 않은 가정 환경에 대한 스트레스와 불만이 유사 간질의 형태로 분출된 것이다.
◆부모 대처법
아이가 안 하던 행동을 하거나 특이한 행동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발견하는 사람은 부모다. 일반적으로 부모는 아이가 특이 행동을 하면 이를 교정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전문의들은 지적하고 바로잡기 위해 교육을 하면 증상이 더 심해지기 때문에 일단은 가만히 놔두라고 말한다. 대신 어떤 상황에서 증상이 나타나는지를 유심히 관찰한 뒤 그 결과를 토대로 아이와 대화할 것을 권한다. 대화가 어렵다면 그림을 그리거나 놀이를 통해 아이와 교감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문의들은 "어른들에게 스트레스는 병이지만 어린이에게 스트레스는 자신이 힘들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일종의 신호다. 부모가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증상이 치료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치료법
증상이 심할 경우에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어린이의 경우 면담 치료가 여의치 않기 때문에 심리분석과 놀이를 통해 스트레스를 치료한다. 필요할 경우에는 약물치료도 실시된다. 소아 스트레스의 원인이 주로 외부 환경에 있다 보니 환경 개선도 치료의 한 과정이다. 특히 가정 문제가 소아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판명될 경우에는 부모 치료가 병행돼야 한다. 하지만 환경 개선이 되지 않을 경우 치료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치료도 6개월 이상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한 가지 나쁜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건강한 자극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문의들은 최선의 치료는 예방이라고 말한다.
동산의료원 정신과 정성원 교수는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특히 소아 스트레스는 의사들의 역할이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 지금 치료하고 있는 다섯 살 아이는 부모 이혼으로 우울증을 앓게 됐다. 1년 이상 꾸준히 치료를 받으면서 증상이 많이 좋아졌지만 완치는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원인을 제거해야 하는데 의사가 부모의 이혼 상황까지 통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아 스트레스는 치료가 쉽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아이에게 상처를 남기기 때문에 평소 애정으로 아이를 보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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