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운문서 화악까지] <34>학일산∼토함산능선

골짜기 들어온 태풍이 나갈곳 못찾아 회오리로 빙빙

청도 금천면 상동곡마을 쪽에서 바라 본 학일산-토함산 능선 일부. 앞으로 동곡재(금곡재) 도로, 그 너머로 토함산(통안산) 바위절벽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오르는 게 학일산 능선이다
청도 금천면 상동곡마을 쪽에서 바라 본 학일산-토함산 능선 일부. 앞으로 동곡재(금곡재) 도로, 그 너머로 토함산(통안산) 바위절벽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오르는 게 학일산 능선이다

대왕산덩이에서 남쪽으로 갈라져 나간 별채의 복잡한 구조는 641m봉~513m봉 사이 4㎞ 구간을 중추 삼아 살피는 게 유리하다. 그 초입에서 '청두산능선'이라 부를 만한 지릉을 하나 갈라 보내고, 종점인 513m봉서 총길이 13㎞가량의 역U자 형 산줄기와 이어지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두산능선 분기점은 641m봉과 불과 몇 분 거리에 있는 629m봉이다. 하지만 산길마저 그 옆구리로 우회해 지나쳐 버릴 정도로 희미하다. 이 때문에 641m봉 출발 얼마 후 오른쪽(서편)으로 묘지가 하나 보이거든 거기가 629m봉 남사면인 줄 알아채는 게 좋다. 묘지 저편에 능선 들머리 시그널이 붙었다.

걷는데 도합 70여 분(하산시간 제외) 걸리는 청두산능선에는 비슷비슷한 높이의 봉우리가 매우 많다. 관하실 구간만도 12봉(실제는 8봉)이라 할 정도다. 그 높이도 마지막 489m봉 외엔 모두 500m 이상이다. 능선 서편으로는 매전면 금천리의 '마당말리' 마을이 펼쳐지다가 관하리 '관하실' 마을이 바통을 넘겨받는다.

한데 이곳 지명에도 혼란이 생겨 있다. 1대 5,000 지형도가 도중의 517m봉과 막바지 501m봉 두 군데에다 '천주산'(天柱山)이라 표기해 놓은 게 발단이다. 현장에서는 누군가가 501m봉에다 '477.1m 천주산'이라고 쓴 플라스틱 조각을 걸어 놓기도 했다.

하지만 현지 어르신들은 모두 마지막에 솟는 489m봉 혹은 그 직전의 501m봉을 합쳐 '청두산'이라 했다. 이걸 동쪽 산으로 삼는 관하실이나 북산으로 기댄 상평리나 마찬가지였다. 꼭대기엔 서쪽 용각산으로 날아갔다는 용마(龍馬) 발자국이 있다고도 했다.

청도읍서 곰티재를 넘어 동쪽으로 내려설 때 전면으로 가장 높게 솟아 보이는 게 저 봉우리다. 거꾸로 매전서 곰티재를 향해 북으로 오를 때도 산줄기들 중간에 정면으로 솟구쳐 가장 선명하고 인상 깊게 마주 보인다. 하지만 청두산은 그 능선에 솟은 봉우리들 중 가장 낮은 것이다. 위치 때문에 시각적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등산로는 관하실마을 안으로 연결돼 있다.

청두산 능선을 갈라 보낸 뒤 중추능선은 잠깐 648m까지 치솟았다가 서편의 상평리 공간과 동편 김전리를 가르며 남동 방향으로 낮아져 간다. 도보로 50여 분 걸려 도달하는 최저점은 345m재. 상평리와 김전리를 직선으로 잇는 고개다. 청도 매전면에서 경산 자인장 가는 최단거리 코스였고, 금천면 김전리 쪽에서 청도읍을 넘나드는 관문이었다고 했다. 산 아래로 두르자면 16㎞가 넘지만 이 재로 지르면 5㎞ 남짓하게 축지(縮地)되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실을 중시해 이 재를 직통하는 차도 건설이 최근에 확정됐다. 개발촉진지구 사업으로 선정돼 국가가 90억 원을 부담, 너비 8m 길이 4.6㎞의 도로를 2년 내에 내기로 한 것이다.

이 중요한 재의 이름에도 혼선이 생겨 있다. 국가기본도를 따라 대개들 '돈치재'라 알고 표기하지만, 현장에선 누구 없이 '도태재' 혹은 '도치재'라 부르는 것이다. '태'가 고개(峙·치)를 의미하는 '티'의 경북 동남부 방언이니 '도태'와 '도치'는 상통한다. 그러나 '도'와 '돈'이 같다는 암시는 어디에도 없다.

이 시리즈 또한 비슬기맥 전체 그림(산경도19 '비슬기맥과 그 주변')에서 천주산·돈치 등의 잘못된 명칭을 사용한 바 있다. 그 외에 '복수덤' 등 몇몇 지명 표기 또한 잘못된 것으로 확인됐다. 하나씩 바로잡아 가다가 최종 교정된 그림을 만들 계획이다.

도태재에는 '상평리 2.5㎞, 김전리 입구 2.5㎞, 통내산·학일산 3㎞'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하지만 바닥길이만 재도 김전리는 3㎞, 토함산(통암산·통내산) 4.25㎞, 학일산 3.25㎞에 이른다.

또 거기서 동편 김전리로 내려가는 도중에 만나는 '김전저수지'를 놓고 일부에서 여전히 '유정지'라는 옛 이름으로 가리키는 것도 교정 대상이다. 본래 조그만 유정지였으나 확장하면서 이름이 바뀌었고, 그 과정에 '교동(橋洞)마을'이 수몰돼 이전한 사실을 기록한 비가 '신교동' 마을 입구에 서 있다.

도태재 서편 상평리 쪽 아래 골은 '도태재골'이라 했다. 하지만 짧게 끝나고 곧 더 큰 계곡에 합류된다. 상평리 입구서 629m봉 아래까지 쳐 오르는 '반곡'(盤谷)이 그것이다. 온통 감밭 세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특이한 골이다. 하지만 빨치산이 설치기 전 그 골 깊은 곳에 20여 호나 되는 '반곡'마을이 있었다고 했다. 그 집터 축대들은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다.

도태재골보다 더 남쪽으로 갈라져 오르는 반곡 가지골짜기는 '녹동골'이라 했다. 거기에 옛날 '녹동'이라는 자연마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형도는 그걸 모르고 그곳 저수지를 '반곡지'라 표기해 놨다. 국가기본도는 대신 영 엉뚱하게 역U자형 산줄기 너머 금곡리 '안버구' 마을 옆자리에다 녹동 마을 표시를 해 놨다. 위치도 엉터리이지만 없어진 마을조차 분간 못하는 게 더 안타깝다. 현지 어르신들이 혀를 찼다.

'녹동골'은 중추능선 중 역U자형 능선 연결점(513m봉)까지 구간의 서편 골짜기다. 도태재서 20여 분이면 오를 수 있는 거리. 하지만 실제 산길이 역U자형 능선과 이어지는 지점은 513m봉이 아니라 그 서편 495m 잘록이다. 걷기 편하게 길을 낸 결과다. 거기도 안내판이 두 개 섰으나 하나는 '학일산 1.2㎞, 통내산 3.5㎞, 돈치재 2㎞'라 하는 반면, 다른 건 '학일산 2.3㎞, 통내산 4㎞'라 한다. 도상 측정한 바닥거리는 학일산 2.25㎞, 토함산(통암산·통내산) 3㎞, 도태재 1㎞ 정도다.

513m봉서 산줄기는 동·서로 갈라져 둥근 역U자 능선을 그려 간다. 그 중 서쪽으로 가는 능선은 점차 높아져 600m대 봉우리를 몇 개 올려 세운다. 그 과정에 몇 개의 지릉들을 갈라 보내 그 속으로 '먼담'(모은정) '수무동' '가라골' 등 하평리(下坪里) 자연마을들을 품어 들인다. 대로에 인접했으면서도 깊은 산촌 분위기가 물씬한 숨겨진 땅들이다. 수무동 한 할머니는 "폭풍이 들어오면 나갈 곳을 못 찾아 회오리로 돌면서 날뛰는 게 이 골"이라 했고, "틀림없이 인근에 (표)범이 산다"고도 확신했다.

국가기본도는 그곳 600m대 봉우리들 중 가장 높은 675m봉에는 '통내산', 산줄기 끝 길가에 솟아 가장 상징적으로 올려다뵈는 630m 절벽봉우리에는 '토한산'이란 이름표를 붙여 놨다.

하지만 저 명칭들은 동일한 하나를 서로 다르게 발음한 결과일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현지인들 발음대로 '토함산'이던 것이 '토한산' 혹은 '통안산'으로 바뀌고 '통내산'으로 한역됐을 가능성이 그 하나다. '통함산'(桶函山) '통암산'(통바위산)을 본딧말로 해서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리라는 추측도 제시돼 있다.

675m봉~630m봉 산덩이의 요체는 뭐니 뭐니 해도 630m봉 남사면 및 그것과 이어지다시피 한 675m봉 남동릉에 형성된 단애 절벽이다. 모습이 세속을 벗어난 땅 같고, 거기 오르면 동창천 일대가 한눈에 꿰인다. 반면 675m봉 본체는 특징이 없을 뿐 아니라 저 절벽에 가려져 보이지조차 않는다. '토함산'이란 이름 또한 675m봉이 아니라 630m봉을 두고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이런 중에 어느 등산단체가 675m봉 돌탑에다 '674.4m 통내산'이란 표석을 붙여 놨다. 하나 그 높이는 그곳 삼각점 것일 뿐이다. 더 북편에 있는 정점의 높이는 675.4m라고 국가기본도에 나와 있다. 잘못된 지명 등재 과정에 관한 지식과 지형도 판별력이 부족한 일반인이 무턱대고 정상석을 세우는 일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를 일깨우는 또 하나의 사례다.

역U자 능선 중 513m봉서 동쪽으로 감아 도는 능선은 얼마 후 최고봉인 해발 693m '학일산'으로 솟구쳤다가 점차 낮아지며, 사실상의 이 능선 마지막 봉우리인 565m봉에서 '동곡재'(210m·금곡재)로 급락한다. 하지만 20번 국도가 지나는 동곡재를 지나서는 다시 427m봉으로 솟는 바, 이걸 국가기본도는 '갓등산'이라 표시하고 현장에도 그렇게 쓴 정상석이 섰다.

그러나 봉우리 남서쪽 기슭에 자리 잡은 금곡리(매전면) 어르신들은 그런 이름을 금시초문이라 했다. 마을에서는 대신 그 산 모양이 말(馬)을 닮은 것으로 전해져 온다고 했다. 뾰족한 정상부가 머리고 마을 쪽 낮은 등성이가 궁둥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을서는 그걸 청도의 은둔선비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1479~1552) 묘소가 있는 그 문중 갓(산)으로 지칭하고 있었다. 그런 뜻에서 '갓등산'이라 했다면 그건 일반명사일 뿐인 셈이다.

삼족당은 무오사화로 희생된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조카다. 청도 각북에 살면서 모두 문과에 급제한 삼형제 중 막내가 탁영이고 맏이의 아들이 삼족당이다. 20여 살 아래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삼족당을 두고 "선(善)을 좋아했으나 쓰이지 못하자 홀로 선을 행했고, 능력을 갖고도 쓰이지 못하자 자기 자신을 이루었다"고 썼다. 그리고는 "이게 천명(天命)인가 시운(時運)인가"라고 물었다.

산줄기는 427m봉 이후 다시 낮아져 해발 260m의 '아래고개'를 거친다. 그걸 지나서는 370m봉으로 다시 올라서며, 그 산덩이 자락 동창천 가에 임진왜란 충절의 상징이 된 '봉황애'와 삼족당의 별장이었던 '삼족대' 등 명소가 있다.

저렇게 해서 완성되는 역U자 형 능선 사이는 매우 좁은 협곡이다. 거기다 그 속으로 '함박등'이라 불리는 645m나 되는 큰 산덩이까지 솟아오름으로써 더 좁아졌다. 하지만 그런 골에도 오랜 세월 '버구'라는 마을이 자리 잡아 왔다고 했다. 아랫버구 중버구 안버구 세 땅으로 나뉘어 민가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U자형 능선을 한 바퀴 도는 데는, 427m봉 산덩이를 빼놓고도 4시간 가까이 걸린다. 날머리 겸 들머리는 동곡재, 아랫마을(금곡리), 농협(기도원), 동산초교(면사무소) 등등이다. 동곡재서 오를 경우 첫 고비인 565m봉 오르는데 40분, 565m봉~학일산 30분, 학일산~513m봉 40분, 513m봉~토함산(정상) 65분, 토함산~630m절벽봉 10분, 하산에 40분이 필요하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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