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아내는 목욕탕 가고
밖엔 비 내린다
손톱깎이 하나 처박힌 곳 모르는
내 집이 낯설다
서랍 안에 서랍이 있다
내심 뒷돈이라도 꼬불쳐둔 것이기를 바라며
서랍을 연다
십 년이나 된 크리스마스 카드
첫차 구입 영수증
군복무 확인서와 해약한 적금통장
마른 오징어처럼 쩌억 눌러 붙어있다
제 꿈 하나 옳게 꼬불치지 못하고
아내는
내가 훌훌 벗어던진 것들만
주워 담고 살았구나
드응신
손톱 깎기도 전에
살점을 뜯겼다
아내 슬리퍼가 빗소리 끌고 온다
떨어진 마음 한 점
얼른 서랍 속에 넣고 돌아앉는다
얼마 전이었던가요, 급히 찾아볼 서류가 있어 예제없이 뒤적거리다가 아내가 쓰는 화장대 아래의 박스까지 열어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엔 연애시절, 같은 회사에 근무하던 내가 출근부 담당이던 아내에게 출근부 갈피에 끼워 보냈던 손으로 베껴 쓴 연애시편들이 한 권의 클리어파일에 오롯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곤 또 연애시절, 내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이 누렇게 빛이 바랜 채 봉투째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을 보고는, 그 중 몇 개를 꺼내 보며 새삼 그 시절 풋풋하던 감정을 겸연쩍게 다시 느껴 보았더랬지요.
"제 꿈 하나 옳게 꼬불치지 못하고", 아내 역시 내게서 떨어져 나간 편린들을 고스란히 "주워 담고" 살아온 것이었습니다. 화자처럼 아내에게 "드응신" 하면서 눙치고 지나가진 차마 못하겠네요.
'사소한 것들의 소중함'을 아내들만큼 잘 아는 존재도 없을 테지요. '작은 소중함'들을 평생토록 생활로 체현(體現)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내들은 어쩌면 이 땅의 시인들보다 한 수 위가 아닐까 합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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