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메아리

좌파 '참여지식인' 사르트르는 1956년 헝가리 침공으로 소련의 야만성이 드러나자 찬양의 대상을 스탈린에서 마오쩌둥(毛澤東)으로 바꿨다. 그는 '펜'으로 문화대혁명을 적극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유럽에 이식하려는 프랑스 극좌파의 운동-목표는 공장 관리자를 감금하고 국회의원을 린치하는 것이었다-에 '행동'으로 '참여'했다.

1970년 봄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1968년 5월 학생 소요로 생겨난 마오주의 조직 '프롤레타리아 좌파'가 주도하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그 조직의 기관지 '인민의 대의' 편집장을 맡았으며 계약결혼한 시몬느 드 보부아르 등 좌파 지식인과 함께 가두 판매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대중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조잡하게 인쇄된 신문을 길거리에서 판매하거나 선동적 전단지를 행인들에게 억지로 쥐여주는 늙은 사르트르(당시 67세였다)를 파리 시민은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볼 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지치지 않았다. 같은 해 10월 르노자동차 공장 드럼통 위에 서서 노동자의 행동을 촉구했다. 하지만 노동자의 반응 역시 파리 시민과 다르지 않았다. 그날의 일을 일간지 '로로르'는 이렇게 전했다. "노동자들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사르트르의 청중은 그가 데리고 온 마오주의자 몇 사람이 전부였다."('지식인의 두 얼굴' 폴 존슨)

사르트르는 이러한 '현실 참여' 과정에서 일부러 체포되려고 했지만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인민의 대의' 가두판매 때는 소원을 이룰 뻔했다. 그를 못 알아본 경찰관이 체포하려 하자 그는 주저 없이 '닭장차'에 올랐다. 하지만 1시간도 안 돼 풀려났다. 사르트르도 운동도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마당에 굳이 사르트르를 잡아넣어 대중의 관심을 다시 환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프랑스 정부의 판단이었던 듯하다.

무단 방북했다 판문점으로 귀환한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한상렬 목사가 경찰에 체포돼 조사를 받고 있다. 실정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체포와 처벌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 구제 불능 종북주의자의 헛소리에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고 있음을 감안하면 체포하지 않고 그냥 둬도 괜찮을 뻔했다는 생각이 든다. 김정일 체제는 누가 봐도 끝장난 체제다. 종북주의자의 요설(妖說)이 메아리가 없는 이유다. 자기주장에 반응이 없으면 제풀에 지치게 돼있다. 내버려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