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근대미술의 향기] 최근배 '雨後(2)'

투명한 여울…빛나는 조약돌

▲종이에 채색, 32×48㎝, 1960.
▲종이에 채색, 32×48㎝, 1960.

큰 비가 오고 난 후 날씨가 들면 뙤약볕 아래서 갑자기 불어난 신천의 개울물을 구경하는 것도 대구 여름 날씨의 한 진경이었다.

황토빛으로 변한 누런 탁류가 거친 물살을 일으키며 한바탕 휩쓸고 내려간 뒤에 다시 차분히 가라앉는 시내를 보면, 잠시 동안 이렇게 그림 속의 풍경처럼 투명한 여울이 되었다. 얕아진 냇물은 바닥을 보이며 물 밖으로 드러난 형형색색의 조약돌들로 반짝인다. 더러 급류에 깊게 파인 바닥들이 곳곳에 남아 이런 곳을 따라 소를 이루며 물길은 제법 세찬 흐름을 만들며 지나간다.

큰 돌 틈들 사이를 부딪치며 빠져나가는 물살의 속도감 있는 표현이 마치 넘실거리는 비단결처럼 아름답다. 거의 세필을 써서 가는 굵기로 조금의 떨림도 없이 죽죽 그어나간 솜씨에서 대단한 공력의 필세가 느껴진다.

얼룩 한 점 남기지 않은 것 같은 고운 채색은 너무나 완벽해 더할 여지 없다. 또 검은 돌에 부딪혀 튀어 오르는 포말의 표현을 위해 흰색의 작은 점들을 찍은 것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빼놓고 간 데가 없어, 화가의 손길을 따라 관객의 눈도 숨죽여가며 그림 속을 쫓아가게 된다.

현대화된 채색수묵화로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 표현을 한 예도 보기 드물다. 자연의 세심한 관찰에 바탕을 둔 곱고 정밀한 묘사도 전통의 소경 산수의 경우라면 이렇게 대상의 근경에만 주목하는 법이 없다.

미세한 표현에서도 섬세하되 요약하고 함축한 상징적인 전경묘사로 나타낸다. 그러나 여기서는 소폭이지만 자연의 한 부분을 화면 구성의 전체로 채택해 직접 대상을 눈앞에서 보는 듯한 인상으로 사실적으로 재현함으로써 근대적인 화경을 획득하고 있다.

목랑의 이런 채색수묵화를 보면 너무나 깨끗하고 섬세한 개성이 느껴져 낯설기까지 한데, 흔히 보는 수묵화의 일반적인 유형과는 매우 다른 특징을 깨닫게 된다.

이당 김은호의 채색수묵화와도 또 다른 그의 독특함을 볼 때, 방법으로 일본화를 익혔지만 소재의 선택이나 정서의 표현에서 친근한 한국의 자연에 대한 그 자신만의 감수성을 짙게 전달하는 비범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1960년 그의 50세에 제작된 이 작품은 어쩌면 신천에 나가 본 풍경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한다. 그 무렵 신천이라면 수성들에서 방천 하류까지 아득히 펼쳐진 천변 어디선가에서 간혹 이런 우후 풍경을 만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미끈한 모양의 청석돌 위로 빠르게 흘러 내려가는 물결을 만지며 내리쬐는 여름 햇빛 아래서 미역 감던 아이들로 북적이던 광경이 목격되기도 했던 옛 기억을 떠올려준다. 다시 보기 어려울 자연의 한 모습을 옮긴 작가의 태도 역시 이 작품의 표현양식만큼 정갈하게 느껴지는 그림이다.

김영동(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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