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행-경북을 걷다] (35)예천 모시골계곡

하늘 가리는 울창한 숲길…차가운 계곡물 손 얼얼

#그림이야기-김윤종 작 '모시골에서'

한여름 뙤약볕에 산길을 걷는 사람을 위해 일부러 그늘을 드리우기야 했을까. 그저 햇살이 탐이 나 가지를 욕심껏 뻗다 보니 마치 서늘한 기운을 가둬 둔 동굴처럼 숲이 우거졌을 뿐. 김윤종 화백은 한 뼘 그늘이 고마운 한여름에 이처럼 너른 차양막을 드리워준 숲이 어지간히 고마웠나보다. 마치 '햇볕 네 녀석이 아무리 따갑다지만 여기까지는 못 오겠지?'라며 약간은 우쭐대듯 숲 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김 화백은 "너무 이름나지 않은 덕분에 이곳 모시골이 원시림 그대로 남아있다"며 "행여 사람들이 찾더라도 쓰레기 하나 함부로 버리지 말고 이 모습 그대로 남겨두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겨울 눈 쌓인 모시골도 한 번 걸어보고 싶다.

한낮 열기를 조금이나마 피할 요량으로 일찌감치 길을 서둘렀다. 오늘 내달을 길은 예천군 상리면 고항리 뒤편 모시골계곡. 예천에서 '곤충연구소' 표지판을 따라가면 어렵지 않게 찾아올 수 있다. 곤충연구소가 들어서기 전만 해도 이곳은 일 년 내내 찾는 이가 드물 정도로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 관람객 61만여 명이 찾아온 2007년 예천곤충바이오엑스포 덕분에 유명세를 떨쳤다.

특히 최근 일대에 등산로가 만들어지면서 산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고 있다. 모시골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 먼저 입장료를 내고 곤충연구소와 곤충생태체험관을 둘러본 뒤 뒤편 구름다리를 건너 모시골 입구에 이르는 방법이 있다. 주차도 편리하고 볼거리도 즐길 수 있다. 굳이 곤충연구소를 들르지 않겠다면 마을 한가운데 시내버스 종점 옆길을 따라 오르는 방법도 있다.

◆곤충생태체험관으로 유명세

백두대간 종주구간인 소백산 묘적봉(1,148m)에서 동남쪽으로 맥을 뻗어내린 계곡이 바로 모시골이다. 쉼터와 정자가 마련된 모시골폭포에서 길을 나선다. 곤충연구소에서 100여m만 올라가면 된다. 쉼터에서 오른쪽은 모시골 마을로 가는 길이고, 왼쪽은 계곡으로 향한다. 모시골폭포까지는 제법 찾는 사람이 많지만 계곡으로 오르는 길은 한적하기 그지없다. 바로 옆에 사과밭만 없다면 아예 사람들이 모르는 곳으로 착각할 정도다. 그나마 사방댐이 있는 곳까지 콘크리트 포장이 돼 있지만 이후부터는 수풀에 길이 덮일 정도다.

채 10분도 걷지 않아 바짓부리며 신발까지 푹 젖었다. 산 아래와는 달리 기온 차이가 심해 풀섶마다 이슬이 가득 맺혔다. 여느 유명한 계곡과 달리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는다. 아직 찾는 이가 드문 덕분이다. 시간이 이르기도 하거니와 워낙 숲이 우거져 산길 초입에선 팔뚝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연일 쉬지도 않고 내려지는 폭염경보와 폭염주의보가 숨을 턱턱 막히게 하지만 이곳에선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길이를 알 수 없는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쉼없이 흘러내리며 눈과 귀를 시원하게 해준다.

하도 인적이 드물어 덜컥 겁이 날 정도다. 이런 골짜기로 찾아들면 저 아래 세상에서 난리가 나도 모를 지경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의 다른 이름은 '배를 채웠다'는 뜻의 충복골이다. 서애 류성룡의 형인 겸암 류운몽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와 가솔 100명과 함께 난을 피해 이곳으로 찾아왔고, 산복숭아, 머루, 다래 등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고 한다.

한참을 오르다 보면 시원한 폭포줄기가 경쾌한 물소리와 함께 계곡을 울린다. 바로 칠칠폭포다. 비스듬하게 누운 바위 위로 거침없는 물길이 쏟아진다. 칠월칠석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나무그늘에 잠시 앉아있으면 주변을 감싸는 냉기가 흘러내린 땀방울조차 쏙 들어가게 할 정도다. 차가운 물줄기는 어떤가. 물에 담근 손이 1분도 채 안 돼 얼얼해질 만큼 서늘하다.

◆칠월칠석날 소원 비는 칠칠폭포

물이 마르지 않고 나무 열매도 넉넉한 덕분일까. 옛날 이곳에서도 사람이 살았던 모양이다. 비록 지금은 수풀 속에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지만 제법 규모가 큰 돌담이 곳곳에 눈에 띈다. 누가 무슨 이유로 외딴 이곳에 들어왔을까. 한낮에도 컴컴할 만큼 나무가 우거진 그늘 아래 서서 잠시 상념에 잠겨본다. 집터 마련하기도 쉽지 않은 가파른 곳에 밭도 일궜으리라. 비록 무엇 하나 넉넉할 것 없는 궁핍한 삶이었지만 그들은 숲과 호흡하며 살았다. 가늠하기도 힘든 옛 사람들의 생활을 상상하며 길을 재촉했다.

계곡을 벗어나면 백두대간 갈림길인 임도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400여m를 가면 겸암굴이 나온다. 겸암이 임진왜란 때 가솔들과 함께 피란왔다 해서 겸암굴로 불린다. 일반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모시골계곡을 알려준 예천읍사무소 장광현 씨는 "임도를 따라 병풍처럼 펼쳐지는 백두대간 준령의 풍경은 한 폭의 산수화"라며 "큰 바위로 이루어진 겸암굴은 입구가 낮아 엎드려 기어서 들어가야 하지만 굴안은 족히 100명이 들어설 정도로 넓다"고 했다. 겸암굴에서 되돌아 나오는 오르막길엔 밧줄도 매어져 있다.

모시골은 걷기에 따라 1시간 코스부터 5시간 코스까지 다양하다. 칠칠바위에서 돌아내려오면 1시간 정도면 충분하고, 여름철에는 모시골폭포→칠칠바위(폭포)→겸암굴→월인정사→모시골 폭포의 3시간 코스가 좋다. 단풍이 절정인 가을이면 묘적봉과 모시골 정상까지 오르는 5시간 코스가 장관이라고 한다. 모시골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원시림이 훼손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백두대간 소백준령 시원한 눈맛

앞서 예천읍에서 이곳에 오려면 하리면에서 풍기 쪽으로 길을 잡아야 한다. 풍기가 아닌 단양 쪽으로 927번 지방도를 타고 가면 상리면 용두리를 만난다. 효자 도시복(1817~1891)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오는 마을이다. 명심보감 '효행편'에 가난하지만 효심이 지극했던 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하루는 병든 어머니가 때 아닌 홍시를 찾기에 도시복은 날이 저무는 줄도 모르고 숲을 찾아헤맸다. 그러던 중 호랑이가 찾아와 넙죽 엎드리더란다. 호랑이 등에 업혀 100여리를 달려 어느 산골 마을에 닿았더니 마침 주인이 제사상을 차리는데 홍시가 있더라는 것. 주인이 말하길,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매년 가을 감 200개를 가려 굴 안에 감춰두면 5월엔 상하지 않은 것이 예닐곱 개에 불과했는데, 올해는 마침 쉰 개가 상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겼는데 알고보니 하늘이 당신의 효심에 감동한 덕분이다"고 했다. 지극한 효심에 솔개와 호랑이, 그리고 하늘도 감동했다는 이야기다. 이를 기리는 효자비가 용두리에 남아있다.

또 모시골 가는 길 옆에 '은풍준시'로 유명한 하리면 동사리도 만난다. 임금님께 진상했다는 유명한 곶감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300년 전 동사리 뒷골에서 자연생 감나무에서 딴 감에서 유래했다고. 준시는 꼬챙이에 꿰지 않고 말린 감이란 뜻. 곶감이 잘됐을 때 햇살에 비춰보면 발갛게 속살이 보이고, 유난히 단맛이 진하다고. 자연생 감나무에서 유래했지만 뿌리와 새순이 나와도 고염나무가 되지 않고, 다른 감나무에 접을 붙여도 안 되며, 다른 동네에서도 잘 자라지 않는단다. 소백산 줄기가 남으로 뻗어내린 이 일대에는 숨겨진 모시골뿐 아니라 대대로 뿌리를 내려 살아온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도 유구한 세월 속에 켜켜이 묻혀있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예천읍사무소 장광현,

예천군 문화관광과 054)650-6395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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