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낙동강시대-스토리가 흐르는 마을](7)문경 금포마을<2>

"다리·도로 뚫리니 살긴 좋은데, 나룻배서 나누던 情이 많이 아쉽제∼\

푸른 빛깔의 머리, 붉은 갈색의 이마, 새하얀 배가 예쁜 놈이 휙 날아들었다. 지푸라기와 진흙이 떨어졌다. 마룻바닥에 진흙이 조금씩 쌓였다. 배가 통통한 놈은 쉴 새 없이 떠났다 돌아왔다. 바닥에 떨어지는 진흙이 쌓일수록 처마에는 둥지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5월,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왔다. 발길이 드문 마당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정자의 대문은 잠겼지만, 담 너머 처마로 드나드는 공간은 열려있었다. 둥지를 만들기 위한 제비의 공역이다.

문경시 영순면 이목1리 금포마을 입향조의 정자, 금주정사(黔洲精舍). 300년이 지난 지금 제비가 주인이다. 5월 지푸라기를 나르던 제비는 2개월여가 지난 지금 완전히 둥지를 틀었다. 둥지는 탄탄했다. 그 사이 새 식구도 들어섰다. 새끼 네 마리가 부화한 것. 새끼 제비들이 주둥이를 쭉 내민다. 지푸라기와 진흙을 나르던 어미는 이제 파리와 하루살이를 물어 나른다. 새끼들은 무럭무럭 자란다. 조만간 날갯짓도 익숙해질 모양이다. 겨울이면 떠날 것이다. 내년 봄에는 또 금주정사의 처마로 돌아올 터. 제비가 강남과 금주정사로 오가는 사이 세월도 그렇게 흘러간다.

◆제비와 함께 되돌아온 고향

검버섯에 주름살이 깊게 팬 홍옹준(81) 할머니. 요즘 주말이면 지팡이를 짚고 집 앞 골목을 나선다. 모퉁이를 돌아 마을 아래를 내려다본다. "서울 큰애가 올 때가 됐는데…."

백발의 홍 씨는 올해 초 남편을 하늘로 떠나보냈다. 홍 씨는 남편을 보내고 이젠 아들을 기다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가방을 둘러멘 아들이 동네 어귀에 나타났다. 홍 씨의 주름살이 펴지고, 입가엔 환한 웃음이 퍼진다.

"어무이, 내가 심어논 땅콩과 도라지 잘 커제?" 가방을 툇마루에 놓자마자 호미를 들고 뒤꼍 텃밭으로 향했다. 할머니도 따라나섰다.

서울의 철도공무원인 아들 강의대(55) 씨는 정년을 앞두고 귀향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어머니가 홀로 집을 지키고 있으니 매주 집을 찾고 있다"며 "정년퇴직하면 고향에 돌아와 함께 살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요즘 어머니로부터 농사일을 배우고 있다. 텃밭에 감자, 땅콩, 우엉을 심고, 도라지와 더덕 키우는 일도 익히고 있다.

천마산 밤나무 숲에 뻐꾸기 소리가 들린다. 할머니는 환갑을 바라보는 아들이 도라지밭 잡초를 뽑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듯 팔순 할머니의 아들도 조만간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다.

◆금포의 애틋한 추억과 명암

20여 년 전 정월 초닷새 금포마을 앞. 꽹과리와 징, 북소리가 천마산에 부대껴 울려 퍼진다. 풍물놀이와 지신밟기로 한 해의 풍년과 안녕을 빈다. 천마산 동쪽 끝자락과 남서쪽 남산 끝자락 사이에 금줄이 쳐져 있다. 동제를 지낼 때는 마을을 나갔던 사람도, 외지인들도 출입이 금지된다. 100명이 넘는 마을사람들을 끈끈하게 이어주던 공동체 행사였다. 금포의 한 해는 그렇게 시작됐다.

천마산과 남산이 분홍빛 진달래로 화창한 봄날, 꽃개나루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부녀자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꽃달임(화전놀이)을 즐긴다. 남정네들은 꽃개나루와 강 건너 하풍나루를 오가며 뱃놀이(선유)로 봄을 만끽한다.

봄에는 또 예천군 풍양면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소를 싣고 강 건너 밭을 갈고 씨를 뿌렸고, 가을이면 수확한 곡물을 부산 등지에서 올라온 배에서 내린 소금과 교환했다. 소금배는 아랫마을 말응리를 거쳐 금포마을을 들렀다 삼강나루로 올라갔다. 콩, 채소와 소금의 물물교환이 이뤄지던 소금창고는 40여 년 전까지 금포의 볼거리였다.

마을의 산 증인인 강치본(71) 이장은 "70년대까지만 해도 뱃놀이와 화전놀이가 유명했지. 근데 다른 동네 사람들이 술을 많이 마시고 뱃놀이하다 사고가 나는 바람에 그때부터 선유가 중단됐지"라고 했다. "맨발로 강물에 들어서면 모래무지들이 발에 밟힐 정도였어. 보리가 익을 때면 은어도 올라왔고, 백포 양수장에서 내려다보면 잉어떼 올라가는 모습이 진짜 장관이었다고."

세월의 흐름은 금포의 풍경도 바꿔놓았다.

다리와 제방 건설은 교통의 편리와 홍수로부터 안전을 가져왔다. 또 대현산 큰고갯길 확장·포장으로 도시로의 교통이 시원하게 뚫렸다. 하지만 금포마을 아래위로 삼강교와 영풍교가 생기면서 나룻배와 사공이 사라졌다. 30년 전까지 흥겨웠던 꽃달임과 뱃놀이도 추억으로 남았다. 5년 전 마을 앞 낙동강 제방을 쌓으면서 강물 범람에 대한 위협은 사라졌지만, 더 이상 마을에서 강 풍경을 조망할 수는 없다. 교통망 확충으로 마을 앞 차량통행이 늘면서 예전에 없던 도난사건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최근 금포마을회관 TV가 사라졌다. 출향인이 80만원을 들여 올 초 설치한 것. 마을회관 방벽에 걸려있던 TV가 선이 잘린 채 감쪽같이 없어진 것. 회관 옆 금주정사도 같은 날 도둑이 들었다. 마침 중요 유물을 별도로 챙겨놓은 덕분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외지인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게 됐다. 옆 동네에서도 비슷한 일이 생겼다. 매운탕 집을 운영하는 백포마을 김용웅(56) 이장이 생계수단인 고깃배의 선외기(엔진과 프로펠러)를 도난당한 것이다.

◆다문화가정, 타성바지, 귀향인들이 잘 어우러진 공동체

한때 120가구를 웃돌던 금포마을에는 현재 30가구 70여 명이 산다. 여섯 가구를 제외하면 모두 홀몸노인이고, 학생으로는 중학생 1명과 초등학생 2명이 고작이다.

매년 정월에 열던 동제와 봄날 꽃달임과 뱃놀이의 정취는 사라졌지만, 공동체의 따뜻함은 묻어있다.

"원래 집성촌엔 그래여. 법이 필요 없다니까. 예전엔 이장도 선거할 정도로 그랬는데, 이제는 할 사람이 있어야지. 차암 내. 그래가꼬 기양 내가 쭉 하고 있다고."

강 이장은 후덕한 인심의 금포마을을 자랑했다. 상주군 사벌에서 50년 전 시집온 강 이장의 아내 조정숙(68) 씨도 옛일을 회상했다.

조 씨는 "고개 넘어 가마 타고 올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50년이 지났어여. 첨엔 울기도 마이 울었제. 시아버지가 잘해 주니 심(힘)이 났지만"이라고 했다. "신랑이 큰고개 넘어 밭일하러 가문 점심 때 내도 새참을 이고지고 신랑 만나러 가는 마음에 심도 안 들고 가슴이 콩닥콩닥해여. 그런데 밭에 가자마자 시어무이가 신랑 옆에 앉지도 못하게 하고 콩 숨어(심어)라카니 울매나 서운했겠어. 내 맘도 모르고 그카니…."

'1월 성곡댁 김용댁 구호댁, 2월 종곡댁 무산댁 이장댁, 3월 인천댁, 여산댁 동산댁….'

곗돈 타는 모임이 아니다. 매월 세 명이 한 조가 돼 돌아가며 마을회관 청소와 관리를 맡는 순번이다. 마을은 이장, 새마을지도자 등 예닐곱 명의 남자를 제외하고 부녀회원들이 중심이 돼 돌아가고 있다.

10년 전 다문화가정을 이룬 강언대(56) 씨 집을 비롯해 인천에 살다 2년 전 들어온 타성바지 박명진(70) 씨 가족, 도시에서 운수업을 하다 최근 귀향한 강병대(38) 씨 가족 등도 집성촌 사람들과 잘 어우러져 산다. 박 씨 가족은 2년 전 문경에 놀러왔다 너무나 아름다운 금포에 반해 아예 마을입구 정자 앞 빈집을 사들여 정착했다.

강언대 씨의 딸 언나(14·문경여중 1년)와 아들 경문(8·영순초교 1년)이는 금포의 재롱둥이다. 언나의 이름은 아버지 이름의 첫 글자와 필리핀 출신 어머니 멘티 옹아이 날시사 씨의 '날'자를 땄다. 경문이도 한자로는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지만, 문경시의 지명을 뒤집어 따온 이름이다. 이들 천진난만한 다문화가정 2세 남매는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 특히 언나는 '우지 마라, 우지 마라, 사랑이란 다 그런 거다. 저마다 아픈 사연 가슴에 묻고 살지….'란 김양의 트로트곡 '우지 마라' 등을 애절하면서도 구성지게 뽑아낸다.

마을 제일 꼭대기 집의 강형대(81) 씨도 고향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15년 전 객지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들어온 그는 독립운동가 강내영 선생의 손자다.

강 씨는 "천마산 넘어 말응리로 가던 곳에 '귀파고개'라고 있었지. 옛날 호랑이가 살았다고 범우골이라고 했는데, 우리 선조들이 그곳에 움막을 치고 살았다"며 "그곳 입구에 선조들이 입향조인 '설월당' 유허비를 세웠다"고 말했다.

강 씨의 아버지는 마을에 양수장을 설치하고 대현산 큰고개를 확장·포장하는 등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한 재일교포 강 씨 형제의 송덕비를 세웠다. 그는 "아버지가 처음에 송덕비를 길 아래쪽에 세웠는데 너무 낮아서 잘 안 보였지. 그래서 내가 돌공장에 부탁해 이정표를 붙여 길 위에 올려놓았다"고 했다.

금포마을은 천혜의 자연환경 못지않게 공동체의 끈끈한 정이 넘친다. 강 씨 집성촌이지만, 다문화가정과 타성바지들이 잘 어우러져 서로 감싸안고 살아가고 있다. 금주정사에 둥지를 튼 제비들처럼.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이원규 ▷사진 이재갑 ▷지도 신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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