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꼭 한 번 비행기를 타볼 거예요."
비행기를 타 보는 것은 혜정(가명·26·여) 씨의 평생 꿈이었다. 지금은 18층 아파트 자신의 작은 방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금방이라도 비를 몰고 올 것처럼 흐린 하늘. 비행기 한 대가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회사에서 준 해외여행 기회였지만 제가 준비되지 않았었나봐요."
그저 그 꿈 그대로 시간만 순탄하게 흘러갔다면 혜정씨는 벌써 그 꿈을 이뤘을 것이다. 하지만 혜정 씨는 잠시 꿈을 접고 있다. 해외여행 비행기 티켓을 받기 불과 3개월 전 '급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꿈을 미룬 효녀
26년간 살아오며 혜정 씨는 해외여행은커녕 자신에게 돈을 쓰는 것도 아까워했다. 지금은 투병생활 때문이라 해도 백혈병을 알기 전에도 혜정 씨는 화장을 하지 않았다. 화장품을 사는 것도 아까웠다. 가족이 먼저였다. 어머니 전미자(가명·53) 씨는 "자기가 벌어서 대학 등록금을 낼 만큼 억척스러웠다"며 "한창 꾸미고 싶은 나이였을 텐데 화장품 살 돈까지 아껴 집에 갖고 왔다"고 말했다.
장녀인 혜정 씨는 늘 어깨가 무거웠다. 간암을 앓던 아버지가 수년간 투병생활을 하다 2006년 고인이 된데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3월 어머니 전 씨도 갑상선암으로 수술대에 누웠기 때문이다. 혜정 씨가 악착같이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러던 혜정 씨에게 지난해 공짜로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3년간 근무했던 회사는 터키로 9박 10일간 해외연수를 보내준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해외연수 일정보다 급성골수성백혈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먼저 찾아왔다. 팔, 다리에 든 멍이 사라지지 않았다. 피곤해서, 그저 어딘가 살짝 부딪쳐 생긴 줄로만 알았다. 종합병원 의료진은 백혈병이라 했다. 지난해 5월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보는 꿈은 잠시 미뤄둬야겠지요."
그때의 기억이 북받쳤는지 혜정 씨의 눈시울이 이내 붉어졌다. 그리고는 한동안 소리내 울었다.
◆도움을 주던 사람
어머니 전 씨는 "우리 혜정이는 항상 남 걱정을 먼저 한다"고 말했다. "장애아동 보호센터에 가봐야 하는데…"라며 간혹 혼잣말을 내뱉는다는 혜정 씨. 어머니 전 씨는 제 몸은 생각 않고 다른 사람부터 생각하는 딸이 답답할 뿐이다. 혜정 씨는 직장 생활을 하며 2주일에 한 번씩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의 손과 발이 되기 위해 장애아동 보호센터를 찾은 터였다. 혜정 씨는 "병마가 찾아든 뒤에도 아이들이 눈에 밟힌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엄마와 함께 살지 않느냐'면서.
사실 1년 넘게 혜정 씨는 항암치료에 적극적이었다. 백혈병과 질긴 싸움을 하면서도 혜정 씨는 '쉬어가는 기간'으로 여기며 재활에 의욕을 보였다. 무균실에 혼자 입원해 있으면서 책을 벗삼아 앞날을 준비해왔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면 완쾌 뒤 제대로 봉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오히려 감사했다. 외래 진료를 받을 때면 밤마다 동영상 강의를 들으며 공부했다.
의료진도 희망이 보인다고 했다. 5차 항암치료까지 잘 견뎌내며 건강을 많이 되찾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혈병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올해 5월 백혈병은 재발하고야 말았다. 사회복지사의 꿈도 잠시 미뤄야했다.
◆병보다 무서운 병원비
머리카락을 다 잃어버린 혜정 씨는 그래도 참 밝았다. 하지만 병원비 이야기를 하자 이내 얼굴이 굳어졌다. 혜정 씨는 "병원비가 무섭다"고 했다. 지난해 쓴 치료비와 입원비만 해도 6천만원이 넘었다. 암보험에 들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난해에는 보험금으로 치료비를 마련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미 보험금을 병원비로 소진해 이제는 기댈 곳이 없다. 2살 터울의 여동생과 골수가 50% 일치하지만 수술 날짜를 차일피일 미뤄온 것도 수술비 탓이었다. 정부에서 지급하는 긴급의료지원비 700만원은 올해 항암치료를 받는 데 썼다.
이제 가족에게 남은 것은 아파트 보증금 2천800만원이 전부다. 2006년 아버지, 2009년 어머니 그리고 혜정 씨까지. 4년 넘게 시달려온 병원비는 밝았던 혜정씨의 웃음을 잠시 멎게 한 이유였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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