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필름통] 여름휴가와 '안경'

어릴 적 대구역 근처 철로를 건너 학교를 다닐 때가 있었다. 그때 철로변에 무단횡단의 위험을 알리는 경고문이 있었다.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간다.' 섬뜩하지만 절묘한 표어였다.

그런데 지금도 매일 5분 먼저 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자신을 본다. 매일 시간과 전쟁을 벌이며, 온갖 스트레스를 다 받고 살아가고 있다. 과도한 업무와 경쟁, 끼니마다 패스트푸드로 배를 채우며 사육당하듯 살아가는 것이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간혹 왜 이렇게 살지라고 반문하지만 기차의 굉음 같은 일상에 묻혀 버린다. 여름 휴가도 마찬가지였다.

'카모메 식당'을 연출한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안경'(2007년)이란 작품이 있다. 복잡하고 각박한 우리 삶의 방식에 조용히 반기를 든 영화다.

남쪽 어느 바닷가가 배경이다.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조용한 곳으로 떠나고픈 다에코(고바야시 사토미)는 그곳에서 마음씨 좋은 민박집 주인과 매년 찾아오는 수수께끼 빙수 아줌마, 시도 때도 없이 민박집에 들르는 생물선생님 등 사람들과 만난다. 아침마다 바닷가에 모여 이상한 체조를 하는 이상한 사람들. 그러나 그 사람들의 나른하며, 즐기는 모습에 마음이 끌린다. 처음에는 낯설지만, 차츰 그 사람들의 일상 속에 들어간다.

'안경'은 성질 급한 사람은 보기 힘든 영화다. 대사도 별로 없고, 줄거리라는 것도 없다. 그냥 사람들의 모습을 지극히 담담한 모습으로 그린다.

그런데 감독은 사색을 요구한다. 왁자지껄한 일상이 아닌,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색이다. 그리고 자신을 추스르라고 요구한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이 빙수를 먹는 장면이다. 바닷가에서 다섯 주인공들이 빙수를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먹는다. 그냥 얼음을 간 하얀 눈송이다. 설탕이나 아이스크림도 얹지 않은, 그래서 아무런 맛도 없을 것 같은 빙수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성스럽게, 마치 제례의식처럼 그 빙수를 먹는다.

우리는 너무 많은 양념을 원한다. 얽히고설킨 불륜드라마도 그렇고, 억지스런 운명의 얼개에 갇힌 복수드라마도 그렇다. 소박하며 단순한 드라마는 누구나 외면하고 만다.

슬로 라이프는 게으른 것이 아니다. 마음의 쉼표이자, 자신을 찾는 노크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바닷가에서 '안경'의 소박한 빙수를 먹고 싶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시원한 얼음 가루를 사각사각 씹는 소리. 상상만 해도 영혼이 청량해지는 느낌이 든다.

김중기 객원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