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부 텍사스 주의 주도인 오스틴시. 여름 한낮 온도가 40℃를 오르내리는 이곳은 21세기 가장 '미국적인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개방'과 '활기', '젊음'과 '다양성', 그리고 실리콘 힐로 불리는 '첨단산업 벨트'. 짧은 단어들이지만 오스틴을 가장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용어들이다.
오스틴은 불과 30년 전만 해도 미국 남부의 전형적인 시골 도시였다. 그러나 이제 오스틴은 델컴퓨터와 모토로라, IBM과 삼성전자 등이 있고 첨단 기업들이 잇따라 둥지를 트는 세계적인 첨단 기술 도시로 변신했다. 오스틴을 들여다보면 미국의 숨겨진 저력을 만나볼 수 있다.
◆일자리가 넘쳐나는 도시
# 지난 8월 초순 텍사스 주립대학의 공대 반도체 소재 연구실에서 만난 이경근(38) 박사. 공대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는 조지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그는 지난해 이 대학 연구원으로 주저없이 자리를 옮겼다. "제가 만지고 있는 이 기계 가격이 200억원쯤 됩니다. 반도체 박막을 만드는 장비로 미국 내 유명 공과대는 물론 웬만한 기업들도 갖고 있지 못한 장비입니다." 이 장비는 몇 년 전 모토로라사가 기증했다. 이 박사는 "이런 고가의 장비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행운"이라며 "장비 사용을 위해 학교와 산학협력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기업들도 많다"고 설명했다.
# 미국 도시생활 전문기업인 스펄링스는 최근 전국에서 가장 데이트하기 좋은 도시로 '오스틴'을 선정했다. 18세에서 48세 사이의 독신 남녀 수가 가장 많고 미국 도시 중 술집에서 마시는 음주량이 가장 많게 나타나는 등 젊은 남녀들의 데이트 활동이 가장 왕성한 것이 선정 배경이다. 소셜 미디어업체 번들닷컴(Bundle.com)은 지난해 미국 100대 도시의 가구당 지출 순위에서 오스틴이 6만7천76달러를 기록해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뉴욕은 3만7천435달러,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는 1만6천446달러를 쓴 것으로 나타났다.
1980년대 초반까지 인구 58만 명의 보잘것없는 도시였던 오스틴. 하지만 올해 기준으로 인구는 170만 명을 넘어섰고 기업 수는 4천여 개, 일자리는 85만 개에 이르는 미국 내 최고의 성장도시로 변신했다.
오스틴 상공회의소 미셀 롤링 회장은 "미국이 불황에 시달리지만 해마다 3만여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유능한 젊은이들이 몰려들면서 평균 연령이 32세에 불과하다"며 "전세계적으로 성장이 가장 빠른 도시 중 하나"라고 오스틴을 소개했다.
◆오스틴의 성장 배경
오스틴의 '기적'은 '위기'에서 비롯됐다.
1980년 초반 불어닥친 석유 산업의 위기로 오스틴의 경제 기반이 흔들리면서 시와 대학, 민간연구소가 힘을 합쳐 새로운 성장 모델을 찾기 시작한 것이 도시 발전의 배경이다.
미셀 회장은 "첨단기술연구 컨소시엄 2개를 유치한 것이 오스틴의 산업 구도를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1983년 미국 내 57개 도시가 유치경쟁을 벌였던 MCC(Microelectronics &Computer Technology Corporation)에 이어, 88년에는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위해 설립된 비영리법인 시메텍(Semiconductor Manufacturing Technology)이 오스틴에 자리를 잡은 것.
하지만 첨단 산업을 선도하는 연구소 유치만으로 오스틴의 역사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시 정부의 적극적인 첨단 기업 유치와 지원 노력이 더해졌기 때문에 오스틴의 성장이 가능했다. 우선 오스틴에 본사를 둔 기업들은 세금이 없고 신규 고용이나 투자비용에 따라 주 정부가 지원을 해준다. 또 첨단 기업에 대해 매년 심사를 거쳐 펀드를 지원해주며 기업의 교육훈련 비용까지 주 정부에서 지원에 나서고 있다.
텍사스 주립대 최진봉 교수는 "오스틴의 친기업 정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주지사나 의원들이 교체되더라도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라며 "국적이나 인종에 관계없이 투자기업에 대해서는 가장 우호적인 곳이 오스틴"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텍사스 대학도 오스틴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미국 내 221개 대학 공학부 중 10위권에 드는 텍사스 대학은 4만8천 명(미국에서 3번째)의 재학생이 있으며 컴퓨터칩, 생명의학, 전자, 텔레커뮤니케이션, 환경공학 등 모든 첨단 분야에서 우수한 인력을 배출하고 있다.
델 컴퓨터의 마이클 델 사장이 텍사스대에 재학 중이던 84년 1천달러의 자본금으로 회사를 설립했고 모토로라도 같은 시기에 오스틴에서 시작했다.
세계의 부러움을 받는 첨단도시가 그렇듯 오스틴 역시 정부와 기업, 대학 간의 유기적 파트너십이 성장의 바탕이 된 것.
◆기업이 찾아오는 도시
삼성전자는 몇 달 전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있는 반도체 공장에 시스템 반도체 생산라인 신설을 위해 내년까지 총 36억달러(약 4조5천억원)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996년 가동을 시작한 오스틴 공장은 삼성전자가 해외에 설립한 유일한 반도체 생산라인이다. 삼성이 텍사스 오스틴을 선택한 이유는 명료하다.
지방정부의 친기업 정책에다 7대 대학에서 배출되는 우수 인력이 많고 반도체 장비업체들이 몰려 있어 기업 활동을 위한 인프라가 뛰어난 때문이다. 오스틴 시는 삼성이 공장 설립을 문의하자 122만1천㎡(37만평) 부지를 무상에 가까운 가격으로 제공하고 시비로 도로와 상하수도 등 도시기반 시설을 설치했다.
오스틴으로 찾아든 기업은 삼성뿐이 아니다. 휴렛 페커드사가 지난 2006년 연구센터를 건립했고 소프트웨어 회사인 ALM사는 캘리포니아에서 본사를 이전했다.
또 올해에만 6개의 중소 회사들이 좀더 나은 기업 환경을 위해 오스틴에 둥지를 틀었다.
현재 오스틴에는 2천 명 이상의 종업원을 둔 회사가 델 컴퓨터와 IBM, 애플컴퓨터 등 무려 22개에 이르고 있다.
21세기를 맞는 오스틴은 또 한 번의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미셀 회장은 "바이오산업과 첨단 의학을 비롯해 영화(애니메이션)와 음악이 결합된 미래 주도형 도시로 도약을 준비중에 있다"며 "유능한 젊은 인력들이 오스틴으로 찾아들고 도시 성장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텍사스 오스틴에서 이재협기자 ljh2000@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국정원, 中 업체 매일신문 등 국내 언론사 도용 가짜 사이트 포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