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8월 29일, 한국은 일본의 일부가 되었다. 이날을 국치의 날이라 한다. 각 매체에는 100년 전 일본의 행위에 분노하고, 독립투쟁을 선양하는 특집이 넘쳐난다. 예나 다름없이 일본에 대한 비난과 자기애적 나르시시즘으로 위안을 삼는 듯하다.
일본은 왜 한국을 식민지화 했으며, 한국은 왜 식민지가 되었는가. 지금까지 이에 대한 논의나 성찰은 없었다. 우리는 식민지 관련 용어에 '강제'라는 수식어를 입힌다. 강제병합, 일제강점기 등이다. 이 용어의 주어는 일본이기 때문에 식민지화 과정에서 한국의 역할은 찾을 수 없다. 피해자의 도덕적 우월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 했다.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이 성찰은 계속되어야 한다. 성찰없는 분노와 비난은 불행한 역사에 대한 책임 회피이다.
근대 이후 일본은 한반도와 일본의 안전을 동일시하는 국방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한반도가 다른 세력의 영향하에 들어가면 자국의 안전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했다.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한반도에 세력 확대를 꾀하는 청나라, 러시아와 전쟁을 한 이유이다. 그래서 일본은 청일, 러일전쟁을 '조국방위 전쟁'이라 한다. 한반도의 확보가 자국을 지키는 것이었다. 나아가 일본은 제국주의 시대에서 독립국가가 되기 위해 식민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일병합 1년 후 일본이 불평등조약을 해소하고 국제사회에서 명실상부하게 독립국가로 인정받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자국의 안전을 위한 이웃 나라의 침략이란 것이 정당할까?
대한제국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한국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전쟁을 한 적이 없다. 한반도 쟁탈을 위한 청일, 러일전쟁에서도 한국은 아무 역할을 못했다. 그 후 한국은 전쟁 없이 을사늑약, 병합조약 등을 통해 식민지가 되었다. 통일적인 국가체제를 가진 주권국가가 전쟁없이 식민지가 된 경우는 없다. 아프리카와 인도 등은 통일적 주권국가 이전의 상태에서 식민지로 전락했다.
조약은 강압적인 것이었으나, 한국의 빈약한 외교력이 초래한 불행이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에게는 외교가 국가 운명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였다. 중립화 정책, 헤이그 밀사사건 등 독립을 위해 고종이 마지막까지 주권수호외교에 매달렸지만 실패했다.
일본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할 방법은 없었는가. 미·일·중·러의 세력이 정립(鼎立)하는 역학구도는 불가능했는가. 러시아와 제휴하여 일본의 침략을 저지할 수는 없었을까. 상해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망명정부로 인정받을 수는 없었을까. 줄타기가 아니라 주변국을 설득하고 신뢰받는 외교가 필요했다.
해방 후의 한반도 분단도 외교 역량의 부족이 초래한 측면이 있다. 강대국과의 외교가 원활하지 못할 때 우리는 "구한말 정세와 같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외교가 한국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의미이다. 근대 100년의 역사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이다.
이성환(계명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이재명, 민주당 충청 경선서 88.15%로 압승…김동연 2위
전광훈 "대선 출마하겠다"…서울 도심 곳곳은 '윤 어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