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울의 광화문 광장하면 인자한 모습으로 책을 펴고 앉아있는 세종대왕 동상을 떠올린다. 이런 대표성 때문일까. 요즘 전직 대통령들의 동상 건립이 전국적으로 활발하다. 이들 동상들은 대체로 대통령 고향에 세워져 지역민들이 기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고향을 중심으로 이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이 많지만 일부에서는 달갑지 않게 여기는 시선도 있다. 최근 대통령 동상 건립 열풍을 들여다봤다.
◆동상 세우기 열풍
최근 만들어진 동상 가운데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상이 가장 눈길을 끈다. 이달 18일 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아 일반에 공개된 김 전 대통령의 전신 동상은 가로·세로 각 10m, 높이 7.3m로 비교적 큰 규모를 자랑한다. 전남 무안군 전남도청 앞 김대중 광장에서 세워진 이 동상은 동신대 김왕현 교수가 제작했다. '인류의 평화-김대중'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으며 김 전 대통령의 인자하면서도 강직한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왼손에는 지팡이가 쥐어져 있어 김 전 대통령의 평소 모습이 오롯이 살아나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동상은 몰래 세워진 경우다. 지난 6월 대구시 동구 신용동에 자리한 노 전 대통령 생가에 실물크기의 동상이 들어섰다. 동상 크기는 받침대를 포함해 대략 1m80㎝로 실제 노 전 대통령의 체격과 비슷하다. 받침대 앞면에는 '제13대 노태우 대통령'이라고 새겨져 있다. 노 전 대통령의 동상은 부인 김옥숙 여사와 아들 재헌씨가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동상 설치 전에 구청이나 마을 주민들과 사전 논의가 없었다. 동구청 관계자는 "구청과 동상과 관련해 협의한 것이 없으며 구청에서는 동상을 생가에 갖다놓은 줄도 몰랐다"고 밝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동상도 최근 만들어졌다. 김 전 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거제에 2층 규모의 기록전시관이 생기면서 외부에 김 전 대통령과 부인인 손명순 여사가 앉아있는 모습의 동상이 설치됐다. 실물 크기의 동상은 마주보고 있는 벤치에 김 전 대통령 내외가 각각 앉아있는 형태로 일반인들이 벤치에 앉아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일종의 포토존 형식을 취한 것이다. 기록전시관은 지난 5월 일반인에게 개방됐다.
올해 1월에는 대통령 휴양지로 활용됐던 청남대에 역대대통령 9인의 동상이 나란히 세워졌다. 청남대 관광 명소화 방안의 하나로 9개월간의 작업 과정을 거쳐 대통령 광장 안에 들어선 것이다. 제작자인 조각가 서창원 씨는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등 9인의 동상 제작 과정에서 유가족과 비서관을 참여시켜 각 대통령마다 특징적인 동작을 담아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모두 실물크기로 제작됐다.
현재까지 세워진 동상이 전부가 아니다. 앞으로도 대통령 동상 건립이 줄줄이 예약돼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은 이르면 올해 안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구미지역 민간단체들로 구성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건립추진위원회는 박 전 대통령의 고향인 구미에 동상을 건립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성금 모금에 나서 이미 사업비 6억 원 전액을 거두었다. 올해 안으로 이 지역에 박 전 대통령을 기리는 동상을 세울 계획이다. 정대석 새마을운동중앙회 구미시지회 사무국장은 "우리 현대사에서 경제발전이라는 큰 업적을 이루었음에도 정치이데올로기에 밀려 지금껏 동상조차 세우지 못했다. 이제서야 시민의 이름으로 동상을 세울 수 있게 돼 의미가 남다르다"고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도 세워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지난 7월 이 전 대통령 45주기 추모사에서 "서울에 위대한 선각자인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세워서 모든 국민들이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또 정치권이나 학계 등에서 오랫동안 이 전 대통령의 동상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돼 온 터라 이 전 대통령의 동상 건립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갑론을박으로 시끌
역대 대통령 동상은 제작될 때마다 논란거리였다. 특히 역사적 평가에서 명암이 엇갈리는 대통령들이 그렇다. 최근 박 전 대통령 동상 건립이 확정됐지만 그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은 한 여론조사 결과 우리 국민 두 명 중 한 명(49.0%)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손꼽을 정도로 국민적 인기를 받고 있다. 가난했던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대통령으로 국민들에게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반면 독재자라는 오명도 가지고 있다.
이런 극명하게 엇갈린 평가때문에 박 전 대통령 동상 건립은 그 자체가 정치쟁점화되기도 했다. 가깝게는 지난 5월 경남지사 선거에서 이문제를 둘러싸고 후보들간 공방이 벌어졌다. 당시 한나라당 이달곤 후보가 '허허벌판이던 창원을 우리나라의 중추산업도시로 만든 박 전 대통령의 위업을 기리고자 동상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밝혔고 이에 김두관 현 경남지사는 동상은 현재와 미래가 없는 과거를 기억하는 상징이라며 비난했다. 실제 박 전 대통령 동상 건립은 이전부터 여러차례 추진됐지만 비난여론에 떠밀려 흐지부지되어 왔다.
최근 노태우 전 대통령 생가에 세워진 동상도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대구를 위해 많은 일을 했고 고향 대구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는 평가와 함께 동상 건립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지만 비난여론도 만만찮다.
12·12사건을 일으킨 주역 중 한 명이고 300억 원 가량의 비자금 추징금도 미납한 대통령을 기리는 동상을 세우는 데 대한 반감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대구경실련 조광현 사무처장은 "사회적 합의 등을 거치지 않은데다 생존 인물에 대해 동상을 세우는 것은 여러모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 동상 건립도 논란을 비켜가지는 못하고 있다. 관이 주도해 세금으로 지원하는 방식에 대한 비난 의견이 여전히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상건립을 둘러싼 다양한 이견 탓에 동상을 세웠다 철거되는 사례도 세계적으로 비일비재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이 그렇다. 이 전 대통령의 동상은 1956년 약 24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만들어졌고 제막식도 성대하게 열렸다. 하지만 이 동상은 4년 뒤 4·19혁명으로 이 전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철거되는 비운을 맞았다.
역대 대통령 동상 건립에 대해 너무 엄격하고 인색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황태갑 영남대 미술학부 교수는 "외국에서는 동상 만드는 것이 자연스럽고 만드는 주체 또한 다양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동상 문화 자체가 경직되어 있다"며 "일제시대와 6·25전쟁 등 격동을 겪으면서 이념 대립이 심해지고 이에 따라 개념 해석에도 혼란을 겪었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사진·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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