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일 병합 100년…침략자들의 본향을 찾아] <하>조슈번벌의 침략

'조선식민지 프로젝트' 10여명이 수십년 간 모의

야마구치현 하기의 무사(武士)마을. 오른쪽 전통 가옥은 유신 3걸 중 한 명이자 조슈번벌의 대부였던 기도 다카요시가 살던 곳이다.
야마구치현 하기의 무사(武士)마을. 오른쪽 전통 가옥은 유신 3걸 중 한 명이자 조슈번벌의 대부였던 기도 다카요시가 살던 곳이다.

그들은 집요하고 치밀했다. 한일병합을 이루기까지 조슈(長州·현재의 야마구치현) 출신 인물로 구성된 '번벌'(藩閥)이 조직적으로 달라붙어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각자 크든, 작든 역할 분담을 하고 오랜 기간 공을 들여 한반도를 식민지화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일병합은 당시 일본의 국가적 과제였는데도 유독 특정지역 출신이 주도하고 실행했던 이유는 뭘까.

■ 침략자들은 한 고향 사람이었다.

한일병합 과정에 등장하는 중심 인물은 10명 남짓이지만 모두 야마구치(山口)현 출신이다. 이들은 조선 공사, 조선주차군사령관, 통감, 총독직을 번갈아 맡으며 한반도를 삼키는 공작을 모의했다.

정치가로는 을사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케 한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고, 군부에는 군사력으로 뒷받침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있었지만 둘이서 전 과정을 도맡은게 아니다.

이토 히로부미 후임으로 제2대 조선 통감이 된 소네 아라스케, 초대 조선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다케, 을사늑약 당시 조선주차군사령관으로 군대를 동원했고 제2대 조선총독이 돼 3·1운동의 빌미를 제공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도 있다. 을사늑약과 한일병합 때 총리로 있던 가쓰라 다로도 큰 몫을 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외무대신을 거친 후 스스로 격을 낮춰 조선공사로 부임한 이노우에 가오루,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 시해를 지휘한 조선공사 미우라 고로도 빼놓을 수 없는 원흉이다. 이 둘은 조선 공사를 교대하는 과정에서 보름 넘게 함께 지내며 명성황후 시해를 모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메이지유신 3걸 중의 한 명인 기도 다카요시는 일찌감치 죽었지만 이들 침략자를 하나로 묶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유신 직후 스승 요시다 쇼인의 뜻에 따라 한때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하기도 했고 조슈번 출신을 세력화한 번벌의 대부격이었다.

그러나 근대 한일관계사 연구로 이름 높은 교토대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61)교수는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예나 지금이나 이웃나라인 한국과의 관계 설정은 일본의 가장 큰 현안입니다. 그 당시에는 (온 힘을 모아) 한일병합에 나설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겠지요."

■ 군국주의자의 뿌리는 하나다.

이들이 메이지 유신의 대열에서 함께 싸운 동지였기에 쉽게 뭉쳤을 것이라 보지만 그것만으론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들과 공동 정권을 구성한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 출신들은 한일병합 과정에서 그렇게 치열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들이 뭔가 특정한 이데올로기와 집단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주변 강대국들로 인해 병합을 추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들의 계보를 따라 올라가면 그 정점에는 정신적인 지도자 요시다 쇼인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 모두는 요시다에게 직접 배운 제자이거나 그의 추종자들이다. 이들을 통해 '일본의 안전을 위해서는 조선이라는 울타리를 갖자'는 요시다의 '정한론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1907년 정미7조약을 체결한 후 사람을 보내 요시다의 무덤에 이를 고한 것이 단적인 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최근 논문을 통해 "조슈 번벌 세력은 요시다 쇼인이 '정한론'을 가르치기 시작한 이래 한일병합에 이어 1919년 고종을 독살할 때까지 63년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한국을 침략했다"며 "이웃나라의 왕과 왕비를 살해하면서까지 목적을 달성하려 한 것은 용서받기 어렵다"고 밝혔다. 어찌 보면 한반도 전체가 일본 서남단의 작은 지방에 의해 유린당하고 찢어발겨진 것이다.

이들의 고향인 야마구치현 하기(萩)시는 비록 규모가 작을지 모르지만, 고적하고 차분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광기어린 에너지가 생성되고 분출됐는지 의아스럽다. 요시다 쇼인이 세운 학당 쇼카손주쿠(松下村塾)앞에 서면 '반(反)윤리적'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요시다의 사상은 날카로운 비수가 돼 100년 전의 한국을 겨눴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도리어 일본을 겨누는 비수가 되고 있지 않을까. 시대에 뒤떨어진 그 사상은 일본 군국주의의 토대가 됐고, 현재까지도 피해를 입힌 이웃 국가들에게 진정어린 사과를 하지 않는 뻔뻔한 국민으로 남아있게 한 촉매제가 되지 않았나 하는 괜한 걱정을 해본다.

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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