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인셉션과 자기최면

주말부부인 터라 매주 주말이면 KTX를 타고 대구에 간다. 맞벌이를 하는 아내의 직장이 동대구역 근처라 함께 퇴근할 때가 많다. 평소 "고생 많았지"라며 반겨주던 그가 지난주엔 도끼눈으로 맞았다. "청문회 봤지? 조사하면 다 나와. 거짓말한 거 있으면 지금 말해!"

서슬 퍼런 위세에 순간 위축됐지만 책잡힐 만한 건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하기야 얄팍한 월급봉투를 위해 하루하루를 근근이 사는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이 뭐 그리 대단한 위계(僞計)를 꾸미고, 거짓부렁이를 늘어놓고, 죄송하다며 넙죽 엎드릴 일이 있을까. 내일이면 탄로 날 거짓말을 자신 있게 내뱉을 배짱도, 용기도 없다. 그러니 보통사람으로 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눈 앞의 광영(光榮)이, 미래에 대한 욕심이 '잘못된 기억'과 '말 실수'를 자연스레 만들어내는가 보다. 이쯤 되면 낙마한 김태호 전 국무총리 후보가 할리우드 영화에서처럼 '인셉션'(Inception'주입)을 당한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하다.

김 전 총리 후보의 좌절은 자업자득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말 바꾸기와 거짓말이 '젊은 사람이 더 심하다'는 민심의 역린(逆鱗)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곤경을 피하려 이리저리 갈지자걸음을 내딛다 결국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진 격이다. 청와대의 인사검증 시스템 부실 논란을 촉발시켰던 지난해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 내정도 같은 맥락이었다.

'정치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된 거짓말로 패가망신한 사례는 비단 우리 정치권만의 일은 아니다. 정치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도 허다하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그가 물러난 건 1972년 벌어진 도청장치 설치가 빌미였지만 "몰랐다"며 어물쩍 넘어가려다 대통령 자신이 무마공작에 나섰던 사실이 밝혀진 게 결정타였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당시 백악관 직원이었던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에 대해 거짓 해명을 했다가 탄핵안이 가결되는 수모를 당했다.

이번에 기운 차게 승전고를 울린 민주당 등 야당도 속으로 두렵기는 마찬가지일 터이다. 이미 국민의 눈높이는 정치인들의 머리 꼭대기보다 더 높아졌다. 이율배반이 아닌지 두고 볼 일이다. 총리와 장관의 낙마 이후 내심 '어명'(御命)을 기다리고 있을 자칭타칭 여권 내 유력 후보들도 손사래부터 칠지 모르겠다. 거리끼는 일이 있다면 소리 없이 기권하는 게 그나마 체통을 지키는 길이다.

이번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가장 눈여겨봤던 후보자가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였다는 동료 기자들이 많다. 부동산 투기'위장 전입'배우자의 위장 취업'스폰서 등 '의혹 백화점'으로 불릴 만큼 문제가 많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한때 언론에 몸담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은 고위 공직자의 부동산 투기 문제와 도덕성에 신랄한 비판을 하면서 스스로에게는 '관대'했던 그 결말이 궁금해서였다. 장관 내정 직후 청와대 춘추관을 찾아 기자들에게 "앞으로 잘 부탁한다. 열심히 하겠다"던 그의 모습을 당분간 공석에서는 보기 힘들 것 같다.

하여튼 모두 초심으로 돌아갈 일이다. 타인에 의한 기억 주입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최면을 걸고 있는 건 아닌지 곰곰이 되짚어보면서….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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