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피폭 65년…"생존자 대부분 질병과 힘겨운 싸움 중"

원폭피해자협회 한판개 대구경북지부장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일본 히로시마 시내 한 주택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2층 목조가옥이 순식간에 무너졌고 한 소년이 무너진 건물 나무 틈새에 몸이 끼여 울부짖었다. 아버지의 손에 구출돼 바깥에 나온 소년의 눈에 비친 세상은 변해 있었다. 하늘은 겨울 초저녁처럼 온통 컴컴했고 검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평소 있던 건물들은 오간 데 없이 모두 사라졌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방공호 대피'를 알리는 다급한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가족과 함께 한참을 달려 방공호로 몸을 숨겼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것이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그 소년은 원폭피해자협회 대구경북지부장인 한판개(74) 씨. 히로시마 피폭 65주년을 맞아 당시의 참혹한 실상을 말하는 한 씨의 입술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말도 말아요. 폭심지(爆心地)서 반경 1.6㎞ 이내 있던 사람은 모두 죽었어요. 숨진 사람들은 불에 플라스틱이 녹아내린 것처럼 너덜너덜 타 있었어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시체도 봤고요."

방공호 생활 3일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온통 시체들로 가득 차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살던 집이 폭심지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는 한 씨는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을 맞고 그 해 연말에 한국으로 귀국했다.

피폭 당시 히로시마·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피해자는 10만여 명. 그 중 4만3천여 명이 귀국했고, 지금 국내 생존자는 2천600명 정도다. 대구경북에는 현재 피폭자가 470여 명이 생존해 있고 200여 명은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피폭자 수첩을 받은 사람들이고 수첩을 못 받은 피폭자도 수백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직도 일본 정부는 피폭자에 대해 내국인과 재외국인 간에 의료비 지원 차등을 두고 있어요. 내국인은 아무 병원에서나 의료비 액수와 관계없이 무상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재외피폭인은 의료비 지원 상한선을 두어 1년에 198만원밖에 혜택을 못 봐요. 차등 해소를 수차례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아직도 꿈쩍하지 않아요."

한 지부장은 일제강점기 동안 수탈 당한 것도 억울한데 피폭자 의료비 지원까지 차등받고 있는 데 대해 분통이 터진다고 했다.

현재 생존 원폭 피해자 대부분은 암이나 백내장·정신박약 등 각종 질병을 앓고 있다. 피폭에 의한 병인지 아닌지 원인규명도 되지 않은 채 투병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원폭 피해자 중에는 홀로 사는 극빈자가 많아요. 하지만 한 달에 일본서 의료보조비로 40만원 받는다고 해서 기초생활 수급 혜택도 주지 않아요. 한마디로 우리 정부의 횡포죠."

한 씨는 올 2월 국회에 '원폭 피해자 특별법'을 발의해놓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수차례 발의만 할 뿐 상정조차 하지 않는 국회가 야속하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원폭 피해 청구권은 아직 살아있어요. 일본에 대한 보상 요구를 계속할 계획입니다. 개개인이 일본을 상대하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우리 국가 차원에서 책임지고 나서주는 게 당당하지 않을까요."

원폭 피해자는 자녀 결혼에도 어려움이 따랐다고 했다. 부모가 피폭자라면 혹시 후손에 원폭 영향이 없을까 결혼을 기피하는 일도 허다했다고 했다. 아직도 일부 피폭자들은 피폭 사실을 숨기고 홀로 가슴 앓이를 하며 한평생을 보내기도 한다고 전했다.

한 지부장도 암에 걸려 벌써 5년째 치료를 받고 있다.

"왜 병에 걸렸는지 원인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싸워온 일들이 아까워 힘든 몸을 이끌고 매일 사무실로 나온다"며 "원폭 피해자들의 피해 보상을 위해 우리 사회가 조금 더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했다.

김동석기자 dotory1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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