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나 유림들은 나라를 위한 마지막 선택으로 '맞서 싸워 물리치거나'(擧義掃淸), '은둔해 유교적 가치를 보존하거나'(去之守舊), '스스로 목숨을 끊어'(致命自靖) 왔다. 그 어떤 방법보다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 이는 관직에 따른 '책임감', 왕에 대한 '충', 자신의 뜻과 다른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려 했던 '결연함', 살아남은 자들에게 당당히 맞서 싸울 것을 전하려 했던 '가르침' 등 숱한 의미가 함축돼 있다. 그들은 시대적 책임감 속에서 '의'(義)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다.
나라가 망하던 무렵 전국에서 90여 명이 목숨을 끊어 순절해 갔다. 가장 많은 순국자는 1910년 8월 나라 잃은 뒤였다. 가장 먼저 단식, 순절한 이는 안동사람 향산 이만도(1842.1.28~1910.10.10)였다. 그의 죽음은 후손들과 안동사람들에게 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항일독립운동의 길로 나서게 했다.
◆끊어진 희망, 죽지 않고 무엇 바라겠는가?
향산은 1905년 을사늑약 소식을 듣고 '5적의 목을 베라'(乙巳五賊斬)는 상소를 올렸다. 향산은 곧바로 일월산 자락으로 들어갔다. 나라를 외세에서 지켜내지 못한 죄인이라 일컬었다. 남루한 옷과 산나물로 목숨을 이어갔다.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망했다. 이 소식은 일월산에 있던 향산에게 엿새 뒤인 9월 4일 전해졌다. 예견했던 일이지만 눈앞이 캄캄했다. 날마다 증조부 묘소에 나아가 통곡했다. 그는 1910년 9월 17일 '유소'(遺疏)를 남기고 음식을 끊었다. "을미년 국모 시해 사건에 한 차례 죽지 못했고, 을사늑약 때 두 번째로 죽지 못했다. 산으로 들어가 구차스럽게 생명을 연장했던 것은 오히려 기다림이 있어서였다. 이제는 희망이 끊어졌다. 죽지 않고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청구동(지금의 안동 예안면 인계리) 율리 만화공 종가에서였다. 9월 18일 큰집 주손인 강호가 올린 아침을 거절했다. 내 뜻을 다시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말했다. 소식을 듣고 몰려든 가족들이 함께 죽겠다며 음식을 끊었다. 향산은 가족들에게 먹기를 권했으나 듣지 않자 곧바로 자결하려 했다. 가족들은 엎드려 사죄하고 눈물로 음식을 먹었다.
향산은 찾아오는 제자들과 경전을 논했으며, 친구들과는 일제의 야만성을 비판하기도 했다. 집안 남자들에게는 자신의 장례 절차를, 여자들에게는 집안살림을 잘 이끌어 갈 것을 주문했다. 죽어가면서도 담담하게 주변의 일들을 정리했다. 선비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숱한 사람들이 죽음의 뜻을 배웠다. 단식을 강제로 중단하려 했던 일경들 앞에 조선 선비의 기개를 보여줬다. 단식 24일째인 1910년 10월 10일 향산은 장렬하게 순국했다.
◆의(義)로움의 길, 후손들에게 등대 같은 죽음
향산은 나라 잃은 백성으로 더 이상 자신을 '소용'(所用)될 바 없는 존재라 여겼다. 자신을 없애는 길만이 온전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임금의 신하로서 '적의 백성'으로 단 하루도 살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였다. 관직에 머물렀던 사람, 대부(大夫)로서 책임을 다했다. 군왕에 대한 의리 지키기를 무겁게 여겼다. 향산이 살았던 시대는 국가와 군왕의 위기의 시대였다.
1894년 갑오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해 왕비 살해를 시도하고 왕권을 농락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의병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의병을 일으키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했다. 단발령과 건양 연호 사용 등 국권이 하루가 다르게 위태로워지던 1896년 1월 23일 선성의진을 결성해 대장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을사늑약 때는 5적의 목을 베라는 상소로 군왕을 위기에서 구하려 했다. 결국 향산은 나라가 무너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산은 단식에 앞서 남긴 유소에서 '30년 전부터 벌어진 위기사태를 목숨 걸고 막지 못한 것'과 '을사년에 신하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 '경술국치를 막지 못한 것' 등 세 가지를 단식을 통한 죽음을 선택한 이유라고 했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강윤정 학예실장은 "향산의 죽음은 나라와 군왕에 대한 의리 지키기였다. 살아남은 선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 죽음이었다"며 "후손들과 안동사람들이 항일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향산 의를 따라 항일독립운동에 나선 후손들
향산의 집안은 구한말 공동체가 붕괴되는 위기를 맞자 3대에 걸쳐 목숨과 재산을 내놓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양반 가문이었다. '행동하는 양심'이었던 향산 집안의 항일독립운동 정신은 지금도 고스란히 전해오고 있다.
향산 죽음으로 후손들은 잇따라 항일독립운동에 나섰다. 동생 만규는 의병에 참가하고 파리장서에 서명했다. 아들 중업은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분통을 이기지 못해 김도현과 의논, 토복 계획을 세우고 '당교격문'(唐橋檄文)을 지어 각 지방에 내붙였다. 1919년 김창숙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장서서명운동에 참여했다. 1921년 한국 유림대표로서 손문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 2통과 중국 군벌 오패부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 1통을 갖고 출국하기로 계획했으나 출국 직전에 발병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사했다.
향산의 며느리, 중업의 처였던 김락은 시아버지의 순국, 남편의 항일투쟁, 두 아들과 두 사위의 독립운동, 게다가 친정 식구들의 만주망명 항일투쟁을 지켜봐야 했던 인물이었다. 그 자신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9년 3·1운동에 앞장섰다. 수비대에 끌려가 고문 끝에 실명했다. 김락의 두 아들인 동흠과 종흠은 제2차 유림단의거에 참가했다. 종흠이 영양 석보 원리에서 자금을 모으다 탄로나 1926년 형제가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김희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은 "향산은 단식하면서 손자였던 동흠·종흠의 손을 잡고 쇠기둥 같은 신념을 가르쳤다"며 "그런 가르침을 받은 후손들의 일제에 대한 저항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고 했다.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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