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 광장] 종이 한 장 차이

흔히들 하는 표현으로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있다. 사물의 간격이나 틈이 지극히 작거나 수량, 정도의 차가 지극히 적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 그 종이 한 장이 계약서나 차용증, 투자약정서 등과 같은 중요한 법률행위에 대하여 기재한 것이라면 어떨까? 아마도 그 종이 한 장의 유무에 따라, 또는 그 종이 안의 표현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초래할 수도 있다. 실제로 재판에서는 그로 인해 승패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필자는 변호사로 일하다 보니 이러한 서류의 중요성을 실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의뢰인은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판사는 자신에게 그러한 법률행위를 한 사실과 그 내용을 증명하라고 요구하고 있다며 답답해하는 경우를 가끔 본다. 그 의뢰인의 입장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늘 아래 진실은 하나인데 상대방이 거짓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답답할 터인데 판사까지 자신에게 그 모든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니 오죽 답답하겠는가? 그러나 이는 입증 책임과 입증의 정도 문제로서 법률요건(예를 들자면 금전소비대차의 경우 돈을 빌려주었다는 사실과 그 변제기가 도래하였다는 사실 등)은 그러한 법률행위의 효과를 주장하는 자가 입증하여야 하며, 그 정도는 법관이 수긍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 의뢰인이 상대방에게 빌려간 돈을 갚으라고 주장하는 것이니 판사로서는 당연히 의뢰인에게 그렇게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이 중요한 법률행위에 대한 서류(위의 경우 차용증 등이 될 것이다)를 작성하지 않았거나 작성하였더라도 분실한 경우 등이다. 차용증 없이 돈을 빌려 주었는데 상대방이 돈을 갚지 않아 소송을 제기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상대방이 돈을 받은 사실 자체에 대하여도 부인할지 모르겠으나 계좌이체나 송금을 통해 돈을 빌려준 경우 통장 등 증거가 있기에 돈을 받은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인정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제 상대방은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위 돈은 빌린 것이 아니고 투자금의 명목으로 받은 것인데 투자한 결과 수익은커녕 손실만 보았으므로 원금과 배당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취지로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판사는 원고에게 돈을 주었다는 사실, 그 돈이 차용금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라고 할 것이다.

이때 돈을 빌려줄 당시 현장에 동석하였던 사람이 있어 증언해 줄 수 있다면 그나마 나을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이때에는 상대방이 그 당시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던 사정, 그즈음 원고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돈을 빌린 사실이 있다는 점 등이 있다면 그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위 돈은 투자금이 아니라 대여금이라고 주장해 볼 만할 것이다. 또한 반대로 상대방에게 투자금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떤 명목으로 어디에 얼마를 투자하였으며, 그 투자 내역에 대하여 원고에게 설명'보고하였는지, 하였다면 그 자료, 수익 등 분배약정, 손실 등에 대한 약정이나 통지 여부 등을 소명하라고 요구하여 상대방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음을 밝히는 것도 괜찮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 상대방이 변제기를 연장해 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의 대화를 녹음해둔 것이 있으면 녹취록으로 만들어 제출하는 것도 좋은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차용증 등 서류 한 장이면 이 모든 것들을 주장하고 증명해야 하는 수고로움과 그에 따른 스트레스, 더 나아가 승소에 대한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정을 너무 중시하는데다 아직까지도 '우리 사이에 뭐 이런 것이 필요하겠나!'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보니 서류를 작성함에 있어 심리적'정서적 장애가 되고 있다.

이는 개인은 물론 사회적 신뢰를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라고 할 것이다. 못 믿기 때문에 법률서류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해와 분쟁을 예방하기 위해, 그리고 만약 후일 혹시라도 오해나 분쟁이 생기더라도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서류를 작성하는 것이다. 서로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고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각종 법률행위 시 법률 서류를 작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종이 한 장 차이가 결코 종이 한 장 차이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박준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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