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산사랑 산사람] 오대산

금강에서 노닐고 무릉계에서 선속을 넘나들다

경치를 표현할 때 '금강'(金剛)은 수사(修辭)의 최고 정점에 위치한다. 그 어원은 두말할 것도 없이 금강산이다. 경치, 역사성, 지리적 특성까지 함축된 말이지만 일반적으로 빼어난 암릉, 수석미를 표현하는 어휘다. 우리나라엔 크게 3개의 금강이 있다. 원조 금강산에 이어 거제의 해금강, 오대산의 소금강이 그것이다. 물론 전국 산 중에 수십 곳이 이미 금강을 차용하고 있다. 그러나 고유명사로 정착된 곳은 이 세 곳뿐이다. 취재팀이 이번에 찾은 곳은 오대산 소금강. 원조 금강과 거제 해금강의 중간에서 '금강'을 연결해주는 가교 역을 맡고 있는 곳이다.

오대산 국립공원은 진고개를 기준으로 오대산지구와 소금강지구로 나뉜다. 오대산지구는 월정사, 상원사 등 명찰과 비로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의 연꽃 모양 산세가 일품이고 노인봉을 중심으로 한 소금강지구는 30리 청학동계곡을 관통하는 소(沼), 담(潭) 트레킹이 유명하다.

날씨는 등산의 만족도를 결정하는 최대 변수. 이번 산행엔 날씨가 제대로 심술을 부렸다. 등산 내내 우의를 한 번도 벗지 못했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당연히 스카이라인이니 산너울이니 하는 것은 기대 자체가 사치였다. 등산로는 진고개-노인봉-청학동 코스. 진고개는 연곡과 평창을 잇는 고개. 비만 오면 땅이 질어 니현(泥峴)이라 불렸다고도 하고 고개가 길어서 진고개가 되었다고도 한다.

#노인의 하얀 머리 같아 '노인봉'

빗속을 뚫고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높은 습도에 우의를 때리는 빗소리까지 보태져 산행은 지루했다. 가끔씩 길 옆에서 모시대를 만나는 것이 큰 위안이었다. 대부분의 꽃들이 꽃잎을 위로 펼쳐 벌을 유혹하는 데 비해 모시대는 화구(花口)를 땅으로 향하고 있다. 꽃낭의 경사가 어느 각도에서 봐도 어색함이 없다. 아래를 지향하는 꽃의 품성이 기특해 다시 한 번 눈길이 간다.

두 시간여를 걸어 노인봉(1,338m)에 도착했다. 멀리서 보면 노인의 하얀 머리 같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가파른 능선을 숨 가쁘게 오르니 안개에 싸인 정상 표지석이 일행을 맞는다. 지금은 날씨가 흐려 사방이 안개에 갇혀 있지만 쾌청한 날엔 주문진 앞 푸른 바다까지 한눈에 펼쳐진다고 한다.

소금강 입구에서 낙영(落影)폭포와 만난다. 이곳은 폭포로도 명성이 높지만 소금강의 입구로서 이정표 구실도 한다. '폭포수가 그림자처럼 떨어진다'는 꽤 시적(詩的)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 곳이지만 지금은 낭만, 서정 대신 소낙비의 심술만이 계곡을 채우고 있다.

#만물상'구룡폭포…비경에 감탄

잠시 후 넓게 펼쳐진 계곡에 백운대의 위용이 시선을 압도한다. 만물상 계곡은 이제 본격적으로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귀면암, 촛대봉, 거인봉은 꿈틀대듯 솟아올라 봉우리를 만들고 제각각의 형상을 한 암봉들은 병풍처럼 계곡을 둘러쳤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노송들은 만물상의 여백을 훌륭하게 메우고 있다.

만물상 거인의 배웅을 받으며 구룡폭포로 향한다. 구룡폭포는 금강산의 구룡폭포와 견줄 만하다고 해서 이름을 따왔다. 아홉 개의 폭포와 소(沼)들이 옥구슬처럼 줄줄이 이어지고 낙차 큰 물줄기들은 마치 용틀임하듯 흐른다.

이 비경 한쪽에 마의태자의 슬픈 사연이 숨어있다.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한 태자는 구룡폭포 계곡 상류에 아미산성을 세우고 고려군과 끝까지 저항했다. 그러나 중과부적. 최후의 전투에서 왕건의 군사들에게 패하고 만다. 이 슬픔과 비켜서 지금은 경치를 즐기는 등산객들의 수다소리만 소란스럽다.

금강문 근처에 식당암(食堂岩)이 있다. 장정 100명이 동시에 앉을 정도로 넓은 암반이다. 마의태자의 군사들이 훈련 중에 이 바위 위에서 밥을 해먹었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율곡은 멋이 생략되고 실용만 남아 있는 이 지명에 불만이 있었는지 그의 문집에 비선암(秘仙岩)이라고 고쳐 적고 있다.

#소금강에서 이이와 허목을 만나다

소금강에서 이이와 허목을 만난건 행운이었다. 오죽헌에서 태어나 강릉과 인연이 많았던 이이는 자주 오대산에 들렀다. 그는 관광만 한 게 아니라 계곡을 두루 다니며 폭포며 암자며 바위에 이름까지 붙여 주었다. 청학동, 소금강이라는 이름도 그의 문집인 '청학동유산록'에서 유래되었다.

바위자락에 '구룡연'(九龍淵) 글자를 남긴 허목은 조선 중기 위대한 학자요, 경세가였다. 특히 그의 동방전서체 유명세는 중국, 일본까지 알려졌으며 삼척의 바닷물까지 물러가게 했다는 일화가 생겨날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전서(篆書)와 암각글씨는 어색한 조합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비문은 해서나 행서 초서로 쓴다. 이 통념을 비웃듯 그는 매우 특이한 필체로 바위에 그의 필적을 남겼다. 역사적 위인과의 조우는 이래서 흥미롭다. 성현의 자취가 서린 흔적 위에서 시공(時空)을 넘어 감성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소와 연화담을 지나 오늘 산행의 종착지 무릉계에 도착한다. 선(仙)과 속(俗)을 가르는 경계라는 무릉계. 이름처럼 선경을 뽐내려는지 물소리가 송림 속에서 힘차게 공명된다. 금강에서 노닐고 무릉계에서 선속을 넘나들었으니 올여름 이만한 호사도 없을 듯 싶다. 빗속에 탁(濁)학동, 우(雨)금강이 된 것 빼고는.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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